[기고] 즉흥음악을 지속적으로 듣는다는 것 : 즉흥/실험음악 공간 ‘닻올림’에 대한 생각

** 본 글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9』 (지은이 : 모임 ‘오작’, 2016년 8월 발행, 발행 :도서출판 예솔) 에 실린 글로, 닻올림 웹사이트에 한해 게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즉흥음악을 지속적으로 듣는다는 것:

즉흥/실험음악 공간 ‘닻올림’에 대한 생각

다양한 음악관과 기보체계가 공존하는 현대음악에서 즉흥성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난다. 한 음악작품의 일부를 즉흥적으로 연주하거나, 제시되어 있는 음형들을 원하는 순서로 연주한다거나, 그래픽으로 기보된 악보들을 연주하는 과정에서 소리를 내는 방법, 또는 소리의 성질이나 음악적 분위기 등을 행위자의 주관적 해석을 통해 구현하는 경우들이 그것이다. 물론 현대 이전의 음악, 또는 그 바깥의 장르들에서도 즉흥적 요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바로크 시대에는 즉흥연주가 관습적으로 이루어졌고, 재즈에서는 즉흥성이 장르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작품이라는 개념으로 묶이지 않는 무명의 즉흥음악은 기존의 사례들과 조금 다르다. ‘연주자 A가 0월 0일 0시에 이 자리에서 즉흥 연주를 할 것이다’라고 소개된 뒤 만들어지는 음악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사건에 가깝다. 이를테면 불을 다 끈 공연장에서 손전등 불빛만 켜놓고 라디오를 든 채 주파수를 잘못 맞췄을 때 나는 노이즈를 들려준다던가, 컴퓨터상의 프로그램을 사용해 어떤 소리를 생성해낸다거나, 때로는 트럼펫, 바이올린 등 악기를 비관습적인 방식으로 연주하거나, 타자기 치는 소리, 턴테이블 바늘로 LP가 아닌 다른 물체를 긁는 소리를 내는 등 사물을 본래 쓰임새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 소리를 내는 식이다. 즉흥이기 때문에 어떤 음악이 펼쳐질지 모른다. 따라서 미리 명명할 수 없다. 예상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그 음악이 연주되기 이전에 연주자가 누구인지, 이 연주자가 어떤 사물 혹은 악기를 사용해 연주할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결국 어떤 음악이 될지는 끝까지 다 들어보기 전에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감상자는 다른 음악을 들을 때와는 다른 나름의 태도로 예민하게 들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 예측불가능함과 불확정성이 즉흥음악의 난점이자 매력이다.

기본적으로 즉흥음악은 행위에 집중한다. 그 말 자체가 음악의 결과적 음향보다도 창작자 혹은 연주자가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즉 행위의 방식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즉흥음악에는 본래 행위자가 가지고 있었던 행동습관, 선호하는 음악적 요소, 또는 연주 당시의 분위기 등 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중 현장에서 즉흥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연주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진 이들이지만, 본질적으로 즉흥음악의 핵심적인 음악적 특성을 따지는 데 가장 중요한 고려대상은 아니다. (물론 즉흥음악은 행위자의 ‘듣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겠지만, 연주현장에서 관객의 ‘듣기’는 또 다른 영역이다.) 즉흥음악이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이 공연을 계속 찾아가는 청중이 있다면, 듣는 것 자체를 넘어 ‘지속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공간 ‘닻올림’

P1100622닻올림의 경우를 보자. ‘즉흥/실험음악 기반의 작은 공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는 공간 닻올림은 2008년에 만들어져 실제로 작은 공간에서 꾸준히 즉흥음악을 연주해오고 있다. 초반에는 닻올림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릴레이’(Relay) 공연 시리즈, 노이즈 듀오 아스트로노이즈(Astronoise), 그리고 노이즈/실험/즉흥음악을 발매하는 레이블 ‘벌룬앤니들’(Ballon&Needle) 등을 통해 즉흥음악을 해오던 류한길, 홍철기, 최준용, 진상태 등의 즉흥음악가들이 주로 연주에 참여했다. 하지만 공연이 거듭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닻올림에 모였다. 기타리스트, 드러머, 첼리스트 등 악기 연주자들은 물론, 작곡가나 실험영화작가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이곳에서 연주했다. 최근 닻올림을 찾았던 국외의 아티스트로는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시리즈 ‘아르스 노바’의 객원지휘자였던 일란 볼코프(Ilan Volkov)와 『핸드메이드 일렉트로닉 뮤직』의 저자이자 현재 레오나르도 음악 저널(Leonardo Music Journal)의 편집장인 니콜라스 콜린스(Nicolas Collins)가 있다.

음악가들이 즉흥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제각각이다. 함께 밴드를 할 사람들을 모집했는데 어쩌다보니 노이즈를 하고 있었다거나, 악보의 제약을 벗어나 자유롭게 음악을 표현하고 싶었다거나 등, 그 이유는 다양하다. 다만 음악가들이 시작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기 이전에, 즉흥음악 그 자체가 어떻게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져 계속되고 있는지 그 역사를 단번에 추적하기는 어렵다. 즉흥음악가인 홍철기에 의하면, 악음/소음, 음악/비음악, 음악가/비음악가의 경계를 허무는 것, 즉 지금의 즉흥음악이 바라는 것과 유사한 것을 지향해왔던 사례들로 제시되는 것들은 루이지 루솔로의 ‘소음 예술’ 선언과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영국 음악가 코넬리우스 카듀의 ‘스크래치 오케스트라’와 그를 주축으로 한 즉흥음악운동, 미국 시카고의 ‘AACM(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reative Musicians)’이나 프리재즈운동, 일본의 온쿄(音響)운동, 전자 즉흥음악 앙상블 ‘AMM’, 기타리스트 데렉 베일리(Derek Bailey)의 음악, 그리고 일본의 ‘재패노이즈’(Japanoise) 등이다[홍철기, “소음·침묵·즉흥의 소리 혹은 음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1, 2012.12.11. 웹사이트 참조]. 즉흥음악이 한국에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여러 움직임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필자가 닻올림을 접하게 된 계기도 위의 예시 중 하나인 카듀의 작품 <논고(Treatise)>때문이었다. 2011년 5월 29일, 통의동 ‘이상의 집’에서는 “음악의 평등으로서의 음향의 탈조직화: 코넬리우스 카듀의 <논고>(1963~1967)”라는 이름의 공연이 열렸고, 류한길, 진상태, 최준용, 홍철기가 무대에 올랐다. 당시 필자는 그래픽 기보법에 관심이 많았고, 193페이지에 달하는 <논고>의 악보가 어떻게 소리가 될지 그 변환과정이 궁금했다. 공연장에 가보니 무대에는 일반적 의미의 악기가 아닌 여러 사물들이 있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사물들은 진동에 가까운 소리를 냈고, 때로는 연주자가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진동하는 사물을 벽에 접촉시켜 소리를 내기도 했다. 악보의 음악화가 궁금해서 찾은 공연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듀의 <논고>가 본래 어떤 작품인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퍼포먼스가 흥미로웠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필자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닻올림의 공연장을 찾기 시작했다.

Cornelius Cardew’s Treatise played by Choi Joonyong, Hong Chulki, Jin Sangtae, Ryu Hankil from Balloon & Needle on Vimeo.

닻올림의 공연이 던져주었던 생각들

P1090527처음에 닻올림의 공연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소리를 만들기 위해 어떤 사물을 사용하는지, 어떤 순간에서 흐름을 바꾸거나 음악을 멈추는지, 모든 순간이 생경했다. 즉흥음악의 특성상 연주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음악이 펼쳐진다. 때문에 새로운 연주자를 만날 때마다 다른 사물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로 시간을 채우는 나름의 방식을 만날 수 있었다. 닻올림에서 공연되는 것을 ‘음악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하기를 주저하게 될 정도로 아주 다양한 소리들을 들어볼 수 있었다.

두세 번 정도 닻올림을 찾았을 때, 즉흥음악에 대한 낯섦과 생경함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두 번째 관심이 대상이 된 것은 소리였다. 악기가 아닌 사물들로부터 비롯되는 소리 혹은 소음은 내 귀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소리’라고 생각해왔던 영역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게다가 소리 혹은 소음을 ‘음악적인 소리’로, 혹은 ‘잘 조율되고 구축된 소리’로 변환시켜 듣기보다는 그저 물리적인 소리 그 자체로 듣게 되었는데, 그 소리의 감각 외에는 아무것도 호출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주 편안한 경험이었다. 다음으로 주목하게 된 것은 한 연주가 시작되고 끝나기까지의 시간이었다. 소리들이 모여서 순간순간 음악이 ‘생성되고 있다’는 감각은 다른 음악들에서 일상적으로 느끼기 힘든 것이었다. 음악작품이라는 유령 같은 존재에 내재된 나름의 시간적 흐름이 아니라, 실제 시간을 기반으로 음악이 그때그때 만들어진다는 느낌은 정말 ‘지금 여기, 이 소리’를 주목하게 했고, 그다음 순간을 예민하게 기다리게 했다. 이 초반의 경험들은 즉흥음악의 조건과 재료에 대한 생각들을 던져주었다.

실험 혹은 음악

즉흥음악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 이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으로 감상하기 시작했을 때 연주자 및 공연에 따라 경험의 밀도와 힘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한 소리를 집요하게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은 음악적 경험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연주자의 개인적 실험을 넘어서 관객과 공유할 수 있는 음악으로서 나름의 매력이 과연 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즉흥과 실험이라는 행위가 전면에 들어선 이상, 그 결과물로 나온 음악의 좋고 나쁨에 대해서 말하기란 쉽지 않다. 실험을 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어딘가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데서 일차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서다. 또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음악을 둘러싼 형식, 음악이 되지 못했던 것, 혹은 음악 이면에 숨겨져 있던 소리들을 겨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음악이 그들의 최종적인 결과물이 아니고, 그저 꾸준히 즉흥/실험음악을 해나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은 이 음악에 대한 판단을 우선 유보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닻올림을 계속해서 찾다 보니 나름의 판단기준이 생긴 것인지, 이 연주가 어땠고, 어떤 부분이 좋았고 어떤 부분이 아쉬웠는지를 점점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꽤 꾸준히 지켜보았던 닻올림의 공연들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다양한 연주자가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그만큼 나의 청취경험이 확실히 넓어진다는 것이다. 아쉬웠던 점은 두 가지다. 대체로 같은 공연장에서 비슷한 시간 안에서 각자 주력하는 사물로 음악을 만든다는 그 실험의 패턴이 유사하다는 것, 그리고 즉흥음악을 듣는 경험이 양적으로는 확실히 다양해졌지만, 과연 질적으로 나아졌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계속 새로운 연주자가 등장하고 낯선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음악을 듣지만, 청취경험의 기본적인 방식은 그대로다. 소리에 대한 실험을 지켜보는 ‘현장의 증인’으로서는 대체로 만족스럽다. 그러나 음악을 지속해서 듣는 관객으로서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닻올림이라는 공간이 지속되었고, 또 그 참여의 장이 확장되었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리고 쌓여가는 공연 횟수만큼 즉흥음악에 대한 감각이 더 정교해지고,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즉흥음악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닻올림의 공연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청취경험이 더욱 좋아졌다고 확신치 못하겠다는 점은 아무래도 아쉽다. 특히 최근의 공연들에서는 보통 3~4명(혹은 팀)이 모여서 한 연주회를 꾸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 사람의 음악을 조금 더 길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리고 여러 명이 모이더라도 공연에 나름의 기획 혹은 일관성이 더욱 잘 드러난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즉흥음악가이자 닻올림의 운영자인 진상태는 “(즉흥음악을) 계속 지켜보다 보면 나름대로 어떤 해석법을 찾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관점과 취향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주관이 생겨서 연주자에 대해 잘한다 못한다 하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진상태 인터뷰, 『인문예술잡지 F』 9호, 2013, 134]. 이 말처럼, 청취자는 물론이고 닻올림의 운영진 혹은 주축이 되는 구성원들도 나름의 관점을 분명히 갖게 되었겠지만 아직 공연장에서는 그 판단이 잘 보이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가능성을 계속 열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속성과 확장성을 얻기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지속적으로 밀도 높은 경험이 가능하도록 공연을 꾸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공간이 아니라 연주회가 지속되려면 청중이 필요하고, 계속 닻올림을 찾아오는 청중들 중 다양한 즉흥음악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더 집요하고 깊게 파고드는 즉흥음악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닻올림은 즉흥음악 신(scene)이 지속 가능하게 만들었고, 여러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판을 만들었다. 이제는 더 좋은 청취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어딘가에 힘을 싣는 작업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글 / 신예슬
원문 /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9』 p113~117

79_Martin Kay : Stadium – played back / diffused



나는 닻올림에서의 첫 번째 솔로 공연/퍼포먼스를 위해 실제 장소에서 전략적으로 설치한 다양한 스피커들과 전기 신호, 변환기들로 구성된 6 채널 사운드 시스템을 통해 녹음한 축구 경기 관람객들의 소리를 선곡, 이들을 제시하고 확산시켰다.

닻올림에서 들려준 녹음은 MCG 경기장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의 가장 중심부의 원형으로부터 스타디움 주변 교외의 가장 바깥쪽 원형까지 어떻게 각각의 물질과 공간적 위치가 관객들의 청각적 투영이란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공명을 재 구성하고 재 맥락화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 관찰하며, 동심원을 그리는 관객의 환호소리와 이들의 궤적을 기록하는 현재 진행중인 프로젝트이다.

그 당시의 퍼포먼스를 회상해보면 다양한 공진을 발생시키는 사물들 (드럼 키트/ 철문/ 플라스틱 지붕) 위에 변환기들을 설치했으나 이 장치들이 매우 강하지 않았으므로 녹음 당시에 약간은 혼란스러웠으나 문이 닫힌 화장실 안에 스피커를 설치함으로써 이 작업은 놀랍게도 확장되었다. – 녹음에서 또 다른 차원들을 부가시켰고 MCG 경기장의 서서히 멀어져 가는 상항을 퍼포먼스의 공간으로 치환시켰으므로.

마틴 케이

Stadium – played back / diffused at dotolim, Seoul, October, 31st, 2015

For my solo presentation/performance at dotolim, I presented and diffused a selection of football crowd recordings played through a 6 channel sound system, consisting of various speakers and transducers strategically placed throughout the venue.

The recordings I played were part of my ongoing project that charts the trajectory of a crowd’s cheering in concentric circles from the innermost ring of the MCG stadium, Melbourne to the outermost ring of its surrounding suburbs – observing how each material and spatial location re-frames and re-contextualises the emotional and psychological resonance of a crowd’s aural projections.

In looking back at the performance, I found that my placement of transducers on various resonant objects (drum kit | metal door | plaster roof) wasn’t so strong and slightly confused the recordings, but the placement of a speaker in the toilet with the door closed proved to be a fantastic extension of the work – it really seemed to add another dimension to the recording and brought the receding situation of the MCG into the performance space.

Martin Kay

번역 : Mr. To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