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즉흥음악을 지속적으로 듣는다는 것 : 즉흥/실험음악 공간 ‘닻올림’에 대한 생각

** 본 글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9』 (지은이 : 모임 ‘오작’, 2016년 8월 발행, 발행 :도서출판 예솔) 에 실린 글로, 닻올림 웹사이트에 한해 게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즉흥음악을 지속적으로 듣는다는 것:

즉흥/실험음악 공간 ‘닻올림’에 대한 생각

다양한 음악관과 기보체계가 공존하는 현대음악에서 즉흥성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난다. 한 음악작품의 일부를 즉흥적으로 연주하거나, 제시되어 있는 음형들을 원하는 순서로 연주한다거나, 그래픽으로 기보된 악보들을 연주하는 과정에서 소리를 내는 방법, 또는 소리의 성질이나 음악적 분위기 등을 행위자의 주관적 해석을 통해 구현하는 경우들이 그것이다. 물론 현대 이전의 음악, 또는 그 바깥의 장르들에서도 즉흥적 요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바로크 시대에는 즉흥연주가 관습적으로 이루어졌고, 재즈에서는 즉흥성이 장르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작품이라는 개념으로 묶이지 않는 무명의 즉흥음악은 기존의 사례들과 조금 다르다. ‘연주자 A가 0월 0일 0시에 이 자리에서 즉흥 연주를 할 것이다’라고 소개된 뒤 만들어지는 음악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사건에 가깝다. 이를테면 불을 다 끈 공연장에서 손전등 불빛만 켜놓고 라디오를 든 채 주파수를 잘못 맞췄을 때 나는 노이즈를 들려준다던가, 컴퓨터상의 프로그램을 사용해 어떤 소리를 생성해낸다거나, 때로는 트럼펫, 바이올린 등 악기를 비관습적인 방식으로 연주하거나, 타자기 치는 소리, 턴테이블 바늘로 LP가 아닌 다른 물체를 긁는 소리를 내는 등 사물을 본래 쓰임새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 소리를 내는 식이다. 즉흥이기 때문에 어떤 음악이 펼쳐질지 모른다. 따라서 미리 명명할 수 없다. 예상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그 음악이 연주되기 이전에 연주자가 누구인지, 이 연주자가 어떤 사물 혹은 악기를 사용해 연주할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결국 어떤 음악이 될지는 끝까지 다 들어보기 전에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감상자는 다른 음악을 들을 때와는 다른 나름의 태도로 예민하게 들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 예측불가능함과 불확정성이 즉흥음악의 난점이자 매력이다.

기본적으로 즉흥음악은 행위에 집중한다. 그 말 자체가 음악의 결과적 음향보다도 창작자 혹은 연주자가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즉 행위의 방식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즉흥음악에는 본래 행위자가 가지고 있었던 행동습관, 선호하는 음악적 요소, 또는 연주 당시의 분위기 등 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중 현장에서 즉흥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연주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진 이들이지만, 본질적으로 즉흥음악의 핵심적인 음악적 특성을 따지는 데 가장 중요한 고려대상은 아니다. (물론 즉흥음악은 행위자의 ‘듣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겠지만, 연주현장에서 관객의 ‘듣기’는 또 다른 영역이다.) 즉흥음악이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이 공연을 계속 찾아가는 청중이 있다면, 듣는 것 자체를 넘어 ‘지속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공간 ‘닻올림’

P1100622닻올림의 경우를 보자. ‘즉흥/실험음악 기반의 작은 공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는 공간 닻올림은 2008년에 만들어져 실제로 작은 공간에서 꾸준히 즉흥음악을 연주해오고 있다. 초반에는 닻올림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릴레이’(Relay) 공연 시리즈, 노이즈 듀오 아스트로노이즈(Astronoise), 그리고 노이즈/실험/즉흥음악을 발매하는 레이블 ‘벌룬앤니들’(Ballon&Needle) 등을 통해 즉흥음악을 해오던 류한길, 홍철기, 최준용, 진상태 등의 즉흥음악가들이 주로 연주에 참여했다. 하지만 공연이 거듭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닻올림에 모였다. 기타리스트, 드러머, 첼리스트 등 악기 연주자들은 물론, 작곡가나 실험영화작가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이곳에서 연주했다. 최근 닻올림을 찾았던 국외의 아티스트로는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시리즈 ‘아르스 노바’의 객원지휘자였던 일란 볼코프(Ilan Volkov)와 『핸드메이드 일렉트로닉 뮤직』의 저자이자 현재 레오나르도 음악 저널(Leonardo Music Journal)의 편집장인 니콜라스 콜린스(Nicolas Collins)가 있다.

음악가들이 즉흥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제각각이다. 함께 밴드를 할 사람들을 모집했는데 어쩌다보니 노이즈를 하고 있었다거나, 악보의 제약을 벗어나 자유롭게 음악을 표현하고 싶었다거나 등, 그 이유는 다양하다. 다만 음악가들이 시작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기 이전에, 즉흥음악 그 자체가 어떻게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져 계속되고 있는지 그 역사를 단번에 추적하기는 어렵다. 즉흥음악가인 홍철기에 의하면, 악음/소음, 음악/비음악, 음악가/비음악가의 경계를 허무는 것, 즉 지금의 즉흥음악이 바라는 것과 유사한 것을 지향해왔던 사례들로 제시되는 것들은 루이지 루솔로의 ‘소음 예술’ 선언과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영국 음악가 코넬리우스 카듀의 ‘스크래치 오케스트라’와 그를 주축으로 한 즉흥음악운동, 미국 시카고의 ‘AACM(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reative Musicians)’이나 프리재즈운동, 일본의 온쿄(音響)운동, 전자 즉흥음악 앙상블 ‘AMM’, 기타리스트 데렉 베일리(Derek Bailey)의 음악, 그리고 일본의 ‘재패노이즈’(Japanoise) 등이다[홍철기, “소음·침묵·즉흥의 소리 혹은 음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1, 2012.12.11. 웹사이트 참조]. 즉흥음악이 한국에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여러 움직임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필자가 닻올림을 접하게 된 계기도 위의 예시 중 하나인 카듀의 작품 <논고(Treatise)>때문이었다. 2011년 5월 29일, 통의동 ‘이상의 집’에서는 “음악의 평등으로서의 음향의 탈조직화: 코넬리우스 카듀의 <논고>(1963~1967)”라는 이름의 공연이 열렸고, 류한길, 진상태, 최준용, 홍철기가 무대에 올랐다. 당시 필자는 그래픽 기보법에 관심이 많았고, 193페이지에 달하는 <논고>의 악보가 어떻게 소리가 될지 그 변환과정이 궁금했다. 공연장에 가보니 무대에는 일반적 의미의 악기가 아닌 여러 사물들이 있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사물들은 진동에 가까운 소리를 냈고, 때로는 연주자가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진동하는 사물을 벽에 접촉시켜 소리를 내기도 했다. 악보의 음악화가 궁금해서 찾은 공연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듀의 <논고>가 본래 어떤 작품인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퍼포먼스가 흥미로웠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필자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닻올림의 공연장을 찾기 시작했다.

Cornelius Cardew’s Treatise played by Choi Joonyong, Hong Chulki, Jin Sangtae, Ryu Hankil from Balloon & Needle on Vimeo.

닻올림의 공연이 던져주었던 생각들

P1090527처음에 닻올림의 공연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소리를 만들기 위해 어떤 사물을 사용하는지, 어떤 순간에서 흐름을 바꾸거나 음악을 멈추는지, 모든 순간이 생경했다. 즉흥음악의 특성상 연주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음악이 펼쳐진다. 때문에 새로운 연주자를 만날 때마다 다른 사물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로 시간을 채우는 나름의 방식을 만날 수 있었다. 닻올림에서 공연되는 것을 ‘음악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하기를 주저하게 될 정도로 아주 다양한 소리들을 들어볼 수 있었다.

두세 번 정도 닻올림을 찾았을 때, 즉흥음악에 대한 낯섦과 생경함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두 번째 관심이 대상이 된 것은 소리였다. 악기가 아닌 사물들로부터 비롯되는 소리 혹은 소음은 내 귀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소리’라고 생각해왔던 영역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게다가 소리 혹은 소음을 ‘음악적인 소리’로, 혹은 ‘잘 조율되고 구축된 소리’로 변환시켜 듣기보다는 그저 물리적인 소리 그 자체로 듣게 되었는데, 그 소리의 감각 외에는 아무것도 호출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주 편안한 경험이었다. 다음으로 주목하게 된 것은 한 연주가 시작되고 끝나기까지의 시간이었다. 소리들이 모여서 순간순간 음악이 ‘생성되고 있다’는 감각은 다른 음악들에서 일상적으로 느끼기 힘든 것이었다. 음악작품이라는 유령 같은 존재에 내재된 나름의 시간적 흐름이 아니라, 실제 시간을 기반으로 음악이 그때그때 만들어진다는 느낌은 정말 ‘지금 여기, 이 소리’를 주목하게 했고, 그다음 순간을 예민하게 기다리게 했다. 이 초반의 경험들은 즉흥음악의 조건과 재료에 대한 생각들을 던져주었다.

실험 혹은 음악

즉흥음악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 이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으로 감상하기 시작했을 때 연주자 및 공연에 따라 경험의 밀도와 힘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한 소리를 집요하게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은 음악적 경험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연주자의 개인적 실험을 넘어서 관객과 공유할 수 있는 음악으로서 나름의 매력이 과연 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즉흥과 실험이라는 행위가 전면에 들어선 이상, 그 결과물로 나온 음악의 좋고 나쁨에 대해서 말하기란 쉽지 않다. 실험을 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어딘가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데서 일차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서다. 또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음악을 둘러싼 형식, 음악이 되지 못했던 것, 혹은 음악 이면에 숨겨져 있던 소리들을 겨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음악이 그들의 최종적인 결과물이 아니고, 그저 꾸준히 즉흥/실험음악을 해나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은 이 음악에 대한 판단을 우선 유보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닻올림을 계속해서 찾다 보니 나름의 판단기준이 생긴 것인지, 이 연주가 어땠고, 어떤 부분이 좋았고 어떤 부분이 아쉬웠는지를 점점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꽤 꾸준히 지켜보았던 닻올림의 공연들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다양한 연주자가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그만큼 나의 청취경험이 확실히 넓어진다는 것이다. 아쉬웠던 점은 두 가지다. 대체로 같은 공연장에서 비슷한 시간 안에서 각자 주력하는 사물로 음악을 만든다는 그 실험의 패턴이 유사하다는 것, 그리고 즉흥음악을 듣는 경험이 양적으로는 확실히 다양해졌지만, 과연 질적으로 나아졌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계속 새로운 연주자가 등장하고 낯선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음악을 듣지만, 청취경험의 기본적인 방식은 그대로다. 소리에 대한 실험을 지켜보는 ‘현장의 증인’으로서는 대체로 만족스럽다. 그러나 음악을 지속해서 듣는 관객으로서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닻올림이라는 공간이 지속되었고, 또 그 참여의 장이 확장되었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리고 쌓여가는 공연 횟수만큼 즉흥음악에 대한 감각이 더 정교해지고,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즉흥음악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닻올림의 공연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청취경험이 더욱 좋아졌다고 확신치 못하겠다는 점은 아무래도 아쉽다. 특히 최근의 공연들에서는 보통 3~4명(혹은 팀)이 모여서 한 연주회를 꾸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 사람의 음악을 조금 더 길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리고 여러 명이 모이더라도 공연에 나름의 기획 혹은 일관성이 더욱 잘 드러난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즉흥음악가이자 닻올림의 운영자인 진상태는 “(즉흥음악을) 계속 지켜보다 보면 나름대로 어떤 해석법을 찾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관점과 취향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주관이 생겨서 연주자에 대해 잘한다 못한다 하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진상태 인터뷰, 『인문예술잡지 F』 9호, 2013, 134]. 이 말처럼, 청취자는 물론이고 닻올림의 운영진 혹은 주축이 되는 구성원들도 나름의 관점을 분명히 갖게 되었겠지만 아직 공연장에서는 그 판단이 잘 보이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가능성을 계속 열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속성과 확장성을 얻기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지속적으로 밀도 높은 경험이 가능하도록 공연을 꾸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공간이 아니라 연주회가 지속되려면 청중이 필요하고, 계속 닻올림을 찾아오는 청중들 중 다양한 즉흥음악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더 집요하고 깊게 파고드는 즉흥음악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닻올림은 즉흥음악 신(scene)이 지속 가능하게 만들었고, 여러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판을 만들었다. 이제는 더 좋은 청취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어딘가에 힘을 싣는 작업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글 / 신예슬
원문 /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9』 p113~117

79_Martin Kay : Stadium – played back / diffused



나는 닻올림에서의 첫 번째 솔로 공연/퍼포먼스를 위해 실제 장소에서 전략적으로 설치한 다양한 스피커들과 전기 신호, 변환기들로 구성된 6 채널 사운드 시스템을 통해 녹음한 축구 경기 관람객들의 소리를 선곡, 이들을 제시하고 확산시켰다.

닻올림에서 들려준 녹음은 MCG 경기장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의 가장 중심부의 원형으로부터 스타디움 주변 교외의 가장 바깥쪽 원형까지 어떻게 각각의 물질과 공간적 위치가 관객들의 청각적 투영이란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공명을 재 구성하고 재 맥락화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 관찰하며, 동심원을 그리는 관객의 환호소리와 이들의 궤적을 기록하는 현재 진행중인 프로젝트이다.

그 당시의 퍼포먼스를 회상해보면 다양한 공진을 발생시키는 사물들 (드럼 키트/ 철문/ 플라스틱 지붕) 위에 변환기들을 설치했으나 이 장치들이 매우 강하지 않았으므로 녹음 당시에 약간은 혼란스러웠으나 문이 닫힌 화장실 안에 스피커를 설치함으로써 이 작업은 놀랍게도 확장되었다. – 녹음에서 또 다른 차원들을 부가시켰고 MCG 경기장의 서서히 멀어져 가는 상항을 퍼포먼스의 공간으로 치환시켰으므로.

마틴 케이

Stadium – played back / diffused at dotolim, Seoul, October, 31st, 2015

For my solo presentation/performance at dotolim, I presented and diffused a selection of football crowd recordings played through a 6 channel sound system, consisting of various speakers and transducers strategically placed throughout the venue.

The recordings I played were part of my ongoing project that charts the trajectory of a crowd’s cheering in concentric circles from the innermost ring of the MCG stadium, Melbourne to the outermost ring of its surrounding suburbs – observing how each material and spatial location re-frames and re-contextualises the emotional and psychological resonance of a crowd’s aural projections.

In looking back at the performance, I found that my placement of transducers on various resonant objects (drum kit | metal door | plaster roof) wasn’t so strong and slightly confused the recordings, but the placement of a speaker in the toilet with the door closed proved to be a fantastic extension of the work – it really seemed to add another dimension to the recording and brought the receding situation of the MCG into the performance space.

Martin Kay

번역 : Mr. Toby

[연주회후기] 눈을 감고 그리는 그림, 맘대로 맞추는 발 박자

공간 ‘닻올림’의 즉흥 음악 정기연주회 후기 // 이정빈

공간 ‘닻올림’은 2008년부터 오피스텔을 개조한 20석 규모의 소형 공연장 및 녹음 스튜디오로 즉흥-실험 음악을 중심으로 정기 연주회를 하는 공간이다. 6호선 상수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오피스텔 지상 7층에 있다.

#1
11월 1일 토요일 저녁 8시, 공간 ‘닻올림’에서 열리는 정기 연주회에 찾아갔다. 나는 공연 시작 시각보다 일찍 근처에 도착하게 되어 홍익대학교 부근에서 저녁을 먹었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길을 따라 공연장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상수역까지 이어지는 토요일 저녁의 와우산로 거리에는 분주한 활기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이 붐비는 밤거리 위에 많은 일이 뒤섞이고 있다. 그것은 고막을 자극하는 여러 결의 소리와 관련되어있다. 거리의 소리가 마구 겹쳐져 부풀어 오른다. 내가 아스팔트에 운동화를 부딪치며 내는 경쾌한 소리는 뾰족하거나 단단한 구두 굽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합쳐졌다. 수다를 떠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순간 차도의 승용차가 내는 엔진 소리에 흩어지기도 한다. 노점에서 즉석에서 쇠를 갈아 귀걸이나 액세서리를 제조하는 남자를 얼마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전동 줄칼을 가지고 내는 요란한 소리가 과열된 오토바이 몇 대의 소리에 뒤덮여 사라져 버렸다. 장갑과 목도리를 파는 상인들의 너스레는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최신 힙합이나 케이팝 가요와 엉겨 붙기도 했다. 각자의 소리가 저마다 뽐내며 밤거리를 긁는 중이었고, 그러다 다른 더 큰 소리에 붙어버리거나, 뒤엉키거나, 마찰하면서 생소한 굉음을 만들어냈다. 정체가 궁금하지만, 정확히 잡아낼 수 없는 그런 소리들과의 술래잡기 한 판이었다.

오피스텔의 현관 유리문에 A4 치수의 공연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버튼을 누르고 잠깐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오피스텔 안에 자리한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친구의 방에 놀러 갈 때처럼 기대되는 과정이었다. 어느 짝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둘은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의 파편들이 오고 갔다.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소리들이었다. 벨이 울렸고 7층에 내려 복도를 따라 걸었는데, 조용한 복도의 끝에서 어느 문에 붙은 포스터 하나가 여기가 공연장임을 작은 소리로 알리고 있었다. 암호를 해독해낸 기분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원룸을 무대와 객석으로 사용하는 공간 안에 무대와 객석이 아주 가깝게 맞붙어 있었다. 빼곡한 전선들, 장비들이 산만하게 널려 있었는데 그것들은 사실 정갈하게 정리된 묘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공연을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괜히 귀가 예민해져서 다른 관객들이 속삭이는 소리까지 모두 다 들어버리고 말았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2
턴테이블에서는 LP 레코드가 재생되지 않았고, 기타에서는 기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라디오나 스피커에서도 익숙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거기서는 전기들이 부딪히며 내는 마찰음, 사물 자체들이 서로 부딪힐 때의 마찰음, 쇠를 긁는 소리, 줄을 켜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시끄럽고 불편한 소리거나,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였다. 연주자들은 사물이나 신체를 마치 악기처럼 어루만지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조율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지거나, 압도적으로 단단한 힘을 뿜어내기도 했다.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진 소리가 내 귀와 머리통을 갈기기도 했다. 그것들은 나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나를 넘어 공간을 가득 채웠고, 벽을 뚫고 밖으로 마구 뛰쳐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광폭한 그것들은 벽에 퉁겨져 다시 내 귀를 파고들어 왔다.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고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불편하고 이상한 소리와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귀는 더욱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소리가 잦아들자,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구체적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더니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고 몇 가지 장면들이 떠올랐다. 악 소리를 지르며 집 안을 뛰어다니고, 젓가락으로 프라이팬을 후벼파던, 한참 동안 라디오 스피커에 귀를 대고 있거나, 그것들을 모조리 분해해보았던 조각난 기억들을 맞추어보았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사물과 소리에 대해 몹시 궁금할 때, 두들겨보고 내리쳐 보며 그것들이 내는 소리를 즐기던 때에는 언제나 그만두라는 명령들이 함께 해왔다. 엄마는 시끄럽다며 귀를 틀어막았고, 선생님은 더 큰 소리를 내지르며 나를 제지했다. “계속 하면 손바닥을 맞는다.” 그러면 나는 그만두곤 했다. 실수나 호기에 의해 벌어진 날 것의 소리는 주변에 방해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들은 귀를 무디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 ‘내서는 안 되는 소리’, ‘들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만둬야 할 소리, 방해되는 소리, 괴롭히는 듯한 소리가 집요하게 귀를 자극한다. “이런 소리를 이토록 길게, 선명하게 들어본 때가 있었나?”, “내가 이렇게 소리에 집중했던 적이 있었나?” 이때 누군가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또 누군가는 무언가 리듬을 찾아낸 건지 스스로 리듬이 되려는 건지 발 박자를 맞추기 시작한다.

65번째 정기 연주회가 열렸던 2014년 11월 9일을 끝으로, 기존의 공간 ‘닻올림’은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닻올림’은 2015년 1월 이후에 열릴 66회 공연부터 새로운 공간에서 정기 연주회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글 // 이정빈

* 이 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에 기고되었던 글로, 원작자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측의 동의를 얻어 게재하였습니다. 원문보기

[제2회 닻올림 백일장] 차석 ‘즉흥음악에 대한 소고’

* 본 글은 2013년 ‘제2회 닻올림 백일장’에서 ‘차석’에 당선된 문광씨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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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음악에 대한 소고

즉흥 음악은 음악의 어떤 본질적인 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끊임없이 그 자체의 선율을, 그것을 만들어내는 몸짓과, 그 몸짓을 만들어내는 육체와 겹쳐 놓고자 한다. 이것은 약간 진부한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음악이 인간의 육체로부터, 몸짓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공간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할 때, 음악이 스스로를 일종의 순수한 시간의 현현으로서, 가장 비언어적이며 가장 비기호적인 추상으로서의 구조물로 간주할 때, 그 감탄할 만한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먼 과거나 미래의 것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즉흥 음악은 이와는 반대되는 것을 추구하며, 마치 창조에 있어 소멸을 정당한 절차로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육체에 밀착해 있다. 그것이 즉흥 음악의 매력이다. 여러 기록 매체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자의적인 죽음과 소멸은 여전히 즉흥 음악의 낭만인 것이다. 무에서부터 시작하여, 무로 끝나야 한다는 진부한 도식을 실현하는 동시에 그것을 개혁하려는 예술적 시도는 즉흥 음악 안에서 매우 강렬한, 형식에 대한 의지를 구성하고 있다. 형식이란 예술이 완수하고자 하는 과업이 가장 숙명적으로 반복해서 실행된 것의 결과물이다. 즉흥음악이라는 형식은 말하자면 형식에 대한 거부이며, 유일한 형식으로서 육체를 긍정하는 것이자, 현재에 대한 찬양이다. 즉흥음악이 육체와 선율의 일치를 꿈꿀 때, 선율의 기원에 대해 해명의 열쇠를 제공하는 요소가 전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추억의 순간적인 응집, 하나의 선율로 번역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선율이 됨으로써 미지의 실체가 형상을 갖게 되고, 모든 움직임이 거기서 유래하게 되는 듯한, 기억의 총체의 추상적인 응집이다. 그리고 선율의 기원에 대한 해명은 즉각적으로 육체의 기원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제는 일종의 형이상학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즉흥음악은, 형이상학이란 세계의 음악적 해명이다, 라는 명제 위에 스스로를 올려놓고 있으므로, 즉흥음악에 있어 형이상학의 필요성은 도취에의 필요성과 더불어 증가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즉흥음악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의혹을 갖게 될 것이다. 육체와 선율 간의 무한한 연결점들로 인해 즉흥음악은 설득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더 밀접하고, 더 내면적인 관계와 소통을 원한다. 기억보다 더 내밀한 것, 즉 망각을 공유한다는 낭만이 다시 한 번 연주자와 관객을 기이한 관계로 묶어 놓는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낭만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과 육체가 즉흥의 선율 안에서 합일점을 찾아내고, 그 지점이 망각 속으로 던져져야만 한다는 절박한 필요가 있다. 보다 덜 과거의 것이 될수록, 현재의 창조성의 밀도가 전 과거의 추억을 압도하여 그 감정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될수록 선율은 순결한 것이 된다. 순결이란 결코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것은 거의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우리를 엄습한다. 우리는 우리가 낡지 않았다는 것을, 과거의 인간들에 비해 조금도 왜소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영감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 그 형상은 항상 과거의 것이므로, 즉흥음악은 그 도취에 있어 영감을 능가하고 압도해야 한다. 즉흥음악은 육체를 항구적인 하나의 영감으로 만들기를 원할 수도 있다. 영감과 도취가 갖는 구분점이 무의미해지는 지점, 형상과 추상 사이에 놓인 선율을 통해, 육체와 넋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지점에 놓인 선율을 통해, 스스로를 망각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즉흥음악이 갖는 특이성이다. 그런 면에서 즉흥음악은 도취의 정형성을 실험하고 있다. 그 감정을, 그 영광의 순간을 다시 체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 과거를 다시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 사람들은 그 음악이 이미 잊혀져버렸다고, 그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없는 이상, 똑같은 곡을 그대로 연주한다고 해도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즉흥음악은 여전히 꿈꾸고 있다. – 그것은 무한히 돌아오는 위대한 순간이며, 죽음 너머로까지 이어지는, 현재를 능가하는 영원한 현재이다.

글 / 문광(門光)

[제2회 닻올림 백일장] 차석 ‘서울의 즉흥음악’

* 본 글은 2013년 ‘제2회 닻올림 백일장’에서 ‘차석’에 당선된 장지한씨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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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년간 서울에서 몇몇 인물들을 중심으로 소리라는 감각을 통해 지속적인 어떤 실천이 이루어 져왔다. 그들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소박하게, 더불어 규정하기 힘든 모호한 모습을 유지해왔지만 사람들에게 하나의 암묵적인 그룹으로 이해되어져왔다. 나는 그들의 어떤 공동체가 서울의 다른 문화적인 실천들과 구분되는 의미있는 풍경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변화시키겠다는 적극적인 선언문도 없었으며 그들을 이끌어가는 중심인물도 없었다. 그저 ‘즉흥음악’ 이라는 표현만이 최대한의 공통분모가 될만큼의 느슨함과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을 찾아나가는 집단적인 실천으로서의 연주가 지속되었을뿐이다.

2012년 10월에 있었던 닻올림픽은 그동안 이들이 보여준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일간의 즉흥음악 페스티벌로서, 공연을 추진했던 진상태는 ‘예술기관의 기금에 의존하지 않고 큰 행사를 치러 내는 의미있는 첫발을 디뎠다’ 라고 자평했다. 즉 그들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실천을 위해 기존의 제도와 거리를 둔 것이다. 이는 자본의 외부를 허락하지 않는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 즉흥음악이 라는 현재의 교환 바깥의 실천을 위해서 필연적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기존 예술계의 시스템과 거리를 유지해왔다. relay, dotolim과 같은 소규모의 정기적인 연주회는 음악가의 공연이 진행되는 기존의 공연장이 아니라 까페, 오피스텔과 같이 음악가와 관객의 전통적인 위계, 교환관계가 무시되는 일상의 공간들이었다. 더불어 연주의 기록들은 manual, Balloon&Needle 과 같은 그들 스스로가 자주적으로 설립한 레이블에서 제작되었다. ‘자신의 작업을 발표할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이 없다는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는 류한길의 말처럼 그들은 기존의 공간 안에서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독립적으로 움직였고 이를 통해서만이 그들만의 새로운 감각을 계속해서 실험할수있었다.

이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현재의 불편한 환경을 돌파하는 만큼이나 그들 내부적으로 공동체를 지속시키는데 있어서도 기존의 모습과 형태를 달리했다. 작업을 지속시키기 힘든 상황에서 등장한 많은 공동체들은 어떤 동인, 컬렉티브의 이름으로 명명하고 그들 공동체 명의의 작업을 가시적인 리스트로만들수있는반면,이들은 그런방식으로 정리해서 파악해내기 힘든 모호하고 중심이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연주회의 기획자와 레이블의 소유자가 그들 공동체의 내부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각 상황에따라 다르다. 이는 모임의 리더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성원 각자의 개인작업과 공동체라는 형식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작가 개개인의, 혹은 공동체라는 집단적인 이름으로 환원할 수 없는 중간지점에서 그들의 작업이 진행되어온 것이다. 이는 가능한 정도의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때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외부와 관계맺으면서 하나의 집단적인 실천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지배적인 흐름과의 거리와 중심을 비워내는 공동체의 모습은 즉흥음악을 통한 새로운 감각을 위해 필연적인것이었을것이다.기존의 공간들은 적극적으로 판매할 수 없는 형식을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고 기업과 다를바 없는 형태로 지분을 나누는 모임의 상황이었다면 그들은 지속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실천을 위하여 독립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요청되고 유효했다면, 나는 역으로 즉흥음악이라는 형식이 그들만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했다는 생각도 든다.

기존의 악기와 연주방식을 넘어 비음악적인 매체를 활용하는 그들의 연주는 노이즈, 자유즉흥과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져왔다. 이는 쉽게 지각적으로 그 구조를 예측하고 이해하는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감각들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충돌하는 모습을 의미했고 보편적인 음악의 형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함과 당혹감을, 새로운 청각적 경험을 갈망했던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움으로 다가 왔다. 이러한 그들의 연주가 보여주는 감각의 복잡함은 우리가 얼마나 제한되고 통제된 감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지를 증명할뿐만 아니라 소리를 통한 즐거움이 과연 어떠한 형식이어야 되는지를 보여 준다. 즉흥음악의 결과는 무한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신선한 텍스트였고 관객들은 연주자가 제시하는 공기의 진동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연주는 다른 무엇도 아닌 순수한 사운드로, 파동으로 다가온다.

가사를 강요하고 멜로디를 강요하는 가요, 혹은 팝음악이 ‘음악보다는 메세지이며 프로파간다’ 로 느껴진다는 홍철기의 말은 그들의 연주가 기존의 관습적인 음악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음악’ 이라는 형식 아래 무한한 청각의 감각을 극도로 협소한 상품의 형태로, 언어로, 어떤 이미지로 소비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형식을 벗어나 진정으로 소리의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들을 청각에 집중시키는것이며 일상의 익숙한 감각을 벗어나는 것이다. 즉흥음악의 형식은 바로 이러한 감각의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데, 수많은 감각들의 예측할 수 없는 충돌은 그 속에 어떠한 명령도, 욕망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연주는 그저 기존의 언어와 문화의 영향력을 파괴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연주에서 각자가 소리를 발생시키는 방식과 감각의 지점이 다를지라도 함께 공유하는 방향은 있는것 같다. 류한길은 자신의 설치작업 [북소사이어티의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대담에서 ‘공기 중의 진동현상이라는 소리의 근본적인 문제‘ 를 고려한다고 말했고 오토모 요시히데는 이행준과 홍철기의 [확장된 셀룰로이드, 연장된 포노그래프]에 대해 ‘그들은 영상과 소리의 시작 지점에 존재하는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것이다‘ 라고 했다. 이처럼 매체가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물질성과 소리가 전달되는 공간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그들의 작업은 기원이 부재한다. 더불어 류한길은 ‘언제나 망가질 수 있는 것들‘ 에 관심이 가며 그러한 시각성이 음향의 문제와 닮아있는것 같다 고 했다. 나는 그들이 연주하는 소리가 증폭되어 공간을 가득 채우는 순간에도 어딘가 약하며, 낯설다고 느껴왔다. 그것은 아마도 해석을 위한 참조대상이 없는채로 자본이 잠식하는 완전한 세상의 감 각을 언제나 역행하는 쪽으로 향하기 때문일것이다.

이렇게 연주의 결과물이 그 속에 어떠한 관습적인 코드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연주자 와 관객을 어떤 공동체, ‘우리’ 의 모습으로 묶어내는것 같다. 연주의 순간, 계급과 젠더를 넘어서는 청각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어떠한 물질도, 이미지도, 기호도 존재하지 않는 목적없는 소리의 교환 은 어떤식으로든 대가를 바라는 지금, 여기의 보편적인 풍경과는 대조적이다. 연주자는 그저 공간안 에 다층적인 파동을 던지는 사람일뿐 특별한 문화적인 기표를 지니지 않는다. 관객 역시 감상의 순간 에 스스로의 어떠한 욕망도, 환상도 투영시킬 수 없다. 즉흥음악이 충돌시키는 복잡하며 낯선 감각은 ‘우리’ 에게 그러한 간극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게 즉흥음악은 형식 내부에 독립적이며, 중심없는 공동체를 이미 스스로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권위를 허락하지 않는 작업이 그들만의 공동체를 필연적으로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공기의 진동을 나누었고 그 사운드는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지난 몇년간의 실천에 홍철기가 말하는 ‘정치적‘ 인 예술이라는 수사는 의미심장하다. 그의 말대로 모든 음악적 규칙과 관습을 부정하며, ‘아무나’, ‘누구나’ 의 예술로서 평등을 향했다. 예술적인 행위가 자본의 내부를 향해, 누군가의 권력속으로 향하는 지금 끊임없이 바깥을, 다른 감각을 향하는 그들의 실천은 지난 몇년간 이곳에서 조용하지만 의미있는 풍경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들이 끊임없이 어딘가 잘못된 곳, 잘못된 장소로 향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그 순간의, 이상한 곳에서의 (불)가능한 해방의 공간을 이어나갈 ‘우리’의 역할만이 남았다.

글 / 장지한

[제2회 닻올림 백일장] 입선 ‘작곡가가 즉흥연주에 빠진 이유’

* 본 글은 2013년 ‘제2회 닻올림 백일장’에서 입선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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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가 즉흥연주에 빠진 이유

즉흥연주는 작곡과 연주가 동시에 이루어 진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오선지를 눈앞에 두고 천천히 해도 될 작곡이라는 절차를 순발력있게 악기 연주와 함께 밟아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단순한 작곡이나 악기연주보다 한 차원 높은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옛 서양음악은 본래 연주자와 작곡가의 분리가 없었으며, 모짜르트, 베토벤 등 후대에 길이 남는 작곡가들 모두 뛰어난 즉흥연주 실력을 발휘했을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럽의 유명한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들은 미사때 훌륭한 즉흥연주를 선보인다. 일례로, 20세기 최고의 프랑스 작곡가 메시앙 역시 수십년을 노트르담의 오르가니스트로 활약하였다. 뿐만 아니라, 악보를 기보하지 않는 수많은 대중음악가들과 재즈 뮤지션들 또한 연주를 통해 작곡을 하거나 아예 즉흥연주를 자유자재로 할 줄 안다.

현재 클래식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지나친 분업화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즉흥연주는 커녕 악기를 자유롭게 다룰줄 모르고 단지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는 것만 잘 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소리를 머릿속에서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감각과 능력이 있다면 물론 이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단지, 1950년대의 일부 음악과 같은 지나치게 수학적이거나 계산적인, 결과적으로 음악적이지 않은 음악이 나올 위험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평소에 악기를 다루지 않는 작곡가는 무대에서의 현실을 잊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곡을 전공한 필자는 즉흥연주를 통해 오선지에 작곡을 하던 평소의 습관에서 비롯된 생각의 틀에서 모처럼 벗어나고자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처음 시작한 즉흥연주의 목적은 청중에게 무엇인가를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012년 4월에 뜻이 맞는 작곡가와 연주자들을 모아 즉흥음악 모임 “이십구”를 만들었을때에도 비슷한 이유로 모임장소를 연습실로 정하고 모임의 성격 또한 비공개 비밀 모임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자 하는 바램이 있었고 모두에게 편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하여 비공개로 모임을 가진 것이다. 이때 모임에 가담한 클래식 연주자 또한 즉흥연주를 통해 그동안 악보를 보고 연주하던 제약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뮤즈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고 즉흥연주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소가 될 수 있었다.

“문래레조넌스 2” 사운드아트 창작 워크샵에 참가하기 이전의 이런 즉흥연주의 경험을 가진 이후,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린 워크샵과 “닻올림픽” 즉흥음악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무대에서 즉흥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연습실이나 워크샵에서 하는 즉흥연주와는 소리 자체는 같을 수 있었으나 몇가지 본질적인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4명이상 되는 대형그룹 내에서의 즉흥연주는 워크샵이나 연습단계에서는 서로의 소리를 듣기는 하되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시끄럽거나 쉼이 없는 바쁜 소리들의 향연이 이어졌다. 그러나 연주 상황에서는 이 모든 사소한 소리들이 청중이 있음으로 해서 더 비중있는 제스쳐들로 다가오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 어느 동작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게감이 강하게 느껴져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소리를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작은 소리가 더 많아지는 연주가 되었다.

같은 행위를 하였을 때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과 청중이 있는 상황 사이에 그 행위의 의미가 차이가 있을 까? 그 일이 그 순간 그곳에서 일어난다는 것 자체는 같을 수 있으나, 청중들이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도 즉흥연주와 행위예술에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흥미로운 것은 즉흥연주는 예측이 불가능한, 짜여진 각본이 어느정도는 있을 수 있으나 악보만큼 구체적으로는 없는, 완전한 라이브 음악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감이 매우 중요하고, 청중으로서 그 현장에 있다는 것이 굉장히 설레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현대음악이나 행위예술, 즉흥음악 모두가 성공률(?)이 상당히 낮은 편인, 검증되지 않은 현재진행형 예술이라서 감상자에게 질 낮은 공연이 선사될 수도 있는 리스크가 있는 공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자나 관객 모두가 흥미를 잃지 않고 자꾸만 해보려고 하고 계속 들어보려고 하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 군계일학처럼 훌륭하게 반짝거리는 예술적 우연이 나타날지 알 수 없다는 점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닐까?

글 / 신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