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변화하는 청취의 장: ‘닻올림픽 2017’ 리뷰

** 본 글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12』 (지은이 : 모임 ‘오작’, 2016년 8월 발행, 발행 :도서출판 예솔) 에 실린 글로, 닻올림 웹사이트에 한해 게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게제를 허락해주신 이승린씨와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변화하는 청취의 장: ‘닻올림픽 2017’ 리뷰

이 승 린

일본에는 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온쿄(Onkyo)’라는 청취운동이 있다. 이 운동은 청취자들로 하여금 ‘음악적인’ 실험음악 소리와 ‘음악적이지 않은’ 도시 소리 사이의 경계를 자발적으로 느슨하게 인식하도록 한 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 필자는 그동안 ‘닻올림 연주회’를 감상하면서 이 사례와 연관된 문제의식을 꾸준히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일상생활이 소음으로 둘러싸인 도시 환경 속에서 귀에 친절하지 않을 수 있는 연주회의 청각적 의미를 찾는 일과 관련이 있다. 이번 ‘닻올림픽 2017’을 관람하는 여정은 그 의미를 찾아보는 첫 번째 단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닻올림과 닻올림픽

2006년 노이즈 음악가 진상태의 개인 사업체로 설립된 ‘닻올림’은 즉흥-실험음악이 연주되는 공간의 이름이자 동시에 연주회 시리즈 제목이기도 하다. 닻올림 연주회가 매달 정기적인 공연을 통해 연주자들에게 연주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왔다면 ‘닻올림픽’은 그 단위를 키운 축제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12년과 2013년에 연이어 열린 후, 4년 만인 2017년 11월에 다시 ‘닻올림픽 2017’이 개최되었다. 이번 행사는 서울문화재단이 주최하는 ‘2017 국제 사운드아트 창작페스티벌 ― 문래공진(Mullae Resonace)’의 연계 프로그램으로, 유럽ㆍ아메리카ㆍ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국가에서 활동하는 총 35팀의 실험음악가들이 참가하여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전야제 1: 수평과 수직, 음악과 소리

11월 8일 서울 통의동 시청각 마당에서 진행된 첫 번째 전야제는 김뉘연ㆍ전용완의 <시는 직선이다>라는 희곡을 진상태와 마틴 케이(Martin Kay)가 사운드로 해석한 퍼포먼스로 진행되었다. 총 2막으로 구성된 희곡은 두 연주자들에겐 공연 지침서이자 일종의 스코어로서 기능한다. 1막과 2막은 각각 ‘수평’과 ‘수직’인 것으로 추정되는 상징적인 인물들의 움직임이 묘사되어 있는데, 두 인물의 동작이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어 이 관계가 마치 시차를 두고 움직이는 동일 인물의 다른 이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시청각에 울리는 두 연주자의 소리와도 공명한다.

<사진> 닻올림픽 2017 : 전야제 1 – 시는 직선이다 / 김뉘연, 전용완
음악 : 진상태, Martin Kay / 사진 : 김인경

시청각 마당을 사이에 두고 각각 옥탑과 문이 활짝 열린 방 안에 자리를 잡은 진상태와 마틴 케이는 1ㆍ2막의 희곡을 교차시키며 연주했다. 초반은 단순한 시그널 소리가 앰비언트 사운드와 뒤섞여 반복되었는데 사방이 구조물로 둘러싸여 있고 지붕은 뚫려 있는 공간 구조 때문에 소리가 마당 가운데를 도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방 안에 있던 마틴 케이가 녹음해온 도시의 소리를 흘려보내기 시작할 즈음 지붕 너머에서 시청각 주변에 사는 주민의 목소리와 골목 바깥의 자동차 소리가 침투해 들어오기도 했다. 그런데 방에서 나오는 소리가 사실적이고 원근감이 있어 현재 들리는 소리가 필드 리코딩인지 아니면 그 시각 발생한 실제 도심의 사운드스케이프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덕분에 시청각 마당에 앉아있던 청취자들은 안팎에서 들리는 소리의 경계를 체험하며 연주자들의 ‘음악적인 소리’와 도시의 ‘음악적이지 않은 소리’ 사이에서 집중과 분산을 경험해야 했다. 여기서 연주자의 소리와 외부 소리의 청각적 지형을 ‘수평’과 ‘수직’의 관계로 본다면 시차를 둔 소리의 다른 이름들이라는 희곡과의 상동성을 추측해 볼 가능성이 생긴다.

전야제 2: 타이완의 실험음악 신(scene)

11월 9일의 두 번째 전야제는 서울 상수동에 위치한 닻올림에서 토크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타이난(타이완 남서부에 있는 도시)에서 실험음악 공간 ‘팅슈오(聽說)/Ting Shuo hear say’를 운영하고 있는 앨리스 후이-솅 창(Alice Hui-Sheng Chang)과 나이젤 브라운(Nigel Brown)이 공간에 대해 발표하고 참석한 사람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2016년 9월 문을 연 팅슈오는 실험음악과 즉흥, 청취 관련 활동과 소리교육의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설립되었다. 타이난은 오래된 사원과 지역 전통 문화가 보전되고 있는 도시여서 팅슈오가 자리 잡은 건물을 비롯해 도시 전체에 옛 소리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런 사운드스케이프를 배경으로 둔 팅슈오에서는 다양한 국가에서 모인 실험음악가들이 한 달에 한번 연주회를 갖고 있고,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대상으로 하는 워크숍 프로그램이나 즉흥 협연 모임이 열리기도 한다. 앨리스와 나이젤에 의하면 타이완의 실험음악은 지난 10년 동안 점진적으로 성장하면서 과거에 비해 관심을 갖는 음악가와 청취자수가 꽤 늘어났다고 한다. 이는 국내 현황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팅슈오의 공간 운영 방식이나 진행되는 프로그램 형식을 보면 자연히 ‘닻올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두 공간이 갖는 유사점들은 이들이 발 딛고 있는 실험음악 신의 보편적 특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사진> 닻올림픽 2017 : 전야제 2
“From Ting Shuo, Tainan, Taiwan’ – 타이완의 실험음악
Nigel Brown, Alice Hui-Sheng Chang / 통역 : 최준용

실험성을 지향하는 소규모 음악 신들은 소수의 음악가들과 이 음악을 꾸준히 소비하는 청취자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신을 유지하는 동력이 되어준다. 신은 새로운 음악가들의 등장에 매우 개방적이고 그들에게 기회의 장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그 생태계가 유지되는 방식은 구속적인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또 다른 실험성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음악이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보통은 앞서간 음악가가 이루어놓은 것들을 취한 다음 그 틈에서 돌파할 수 있는 부분을 뚫고 나오기 때문이다. 실험음악이 수용 가능한 소리에 한계를 두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음악을 느슨하게나마 군집화해볼 수 있는 형식적 조건들―신체ㆍ사물ㆍ공간을 활용하는 것, 악기의 변용, 필드 리코딩, 오디오비주얼 작업 등을 즉흥으로 연주하는 것 등―이 보인다는 것은 이 점을 설명해준다. 그 새로움을 구별 짓는 기준으로 ‘세대’를 꼽을 수도 있지만 타이완과 닻올림의 사례를 보면 세대 간 공유하는 문화적 정서나 테크놀로지에 대한 경험이 이질적일 수는 있어도 대체로 이들 사이는 서로에게 호의적이고 교류도 적극적인 편이다.

목소리, 신체, 공간

<닻올림픽 2017> 야생합창단 / 지휘 : Phil Minton 필 민튼
사진 : 박정근(조광사진관)

11월 10일부터 3일간 진행된 본 공연은 ‘야생합창단(Feral Choir)’의 퍼포먼스로 시작되었다. 이번 ‘국제 사운드아트 창작워크숍 문래공진7’의 강사진으로 영국의 보이스 퍼포머 필 민튼(Phil Minton)이 초청되면서 그가 진행한 즉흥 합창 워크숍의 결과 발표가 닻올림픽의 첫 무대로 올랐다. 야생합창단은 민튼이 1960년대부터 진행해온 합창 워크숍으로 훈련받지 않은 일반인들이 참여할 수 있다는 큰 특징을 갖고 있다. 음악가와 일반인이 섞여 있던 이번 합창단은 민튼의 지휘 아래 입으로 구사할 수 있는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은 말의 형태를 갖추기 이전의 소리들처럼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고 옆 사람이 내는 소리와 조우하며 그 안에서 소리의 높낮이와 입 모양에 따른 차이를 만들고 함께 어울렸다. 그렇다고 소리들이 언어의 궤도에서 아주 멀어져 있진 않았는데 마치 문장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쉼표(,) 마침표(.) 따옴표(“”) 느낌표(!) 물결(~) 등을 소리로 대변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합창단은 다함께 소리를 내다가 구역별로 나뉘어 각기 다른 소리를 내기도 하고 중간 중간 민튼의 목소리가 침투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했다.

<닻올림픽 2017> 12 Dog Cycle (Alice Hui-Sheng Chang & Nigel Brown)
사진 : 박정근(조광사진관)

앨리스 후이-솅 창의 퍼포먼스도 신체를 통한 목소리의 변모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그는 이번 닻올림픽에서 두 번의 공연을 선보였는데 첫 번째는 나이젤 브라운과 함께하는 프로젝트 그룹 ‘12 dog cycle’의 퍼포먼스였고, 두 번째는 클라리넷 연주자 미하엘 티케(Michael Thieke)와 실험음악가 가와구치 타카히로(Kawaguchi Takahiro)와의 협연이었다. ‘12 dog cycle’에서 앨리스는 가늘고 뾰족한 고음역대의 목소리를 천천히 숨 쉬듯 내쉬면서 나이젤이 재구성한 전자 아코디언 소리에 즉흥적으로 반응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이젤의 특정 음역대와 짧은 평행선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이내 다시 벗어나 이질적인 질감으로 공간을 맴돌았다. 그 소리가 공기를 최대한 뺀 건조한 날것의 느낌이어서 상대적으로 공기로 가득한 공간에 뚜렷하게 맺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미하엘 티케와 가와구치 타카히로와의 협연에서는 전통악기와 사물의 변용된 주법 틈에서 자유롭게 조우하다가 중간에 연주장 뒤편으로 이동해 앞뒤로 소리를 채우고 객석에 앉은 사람들 사이에 소리가 반사되도록 했다. 앨리스의 목소리는 자신의 신체를 울림통 삼아 공간에 증폭되었는데, 그 소리를 다시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객석에 앉은 신체들의 몫이었다.

Crack 1: 악기와 사물의 변용

즉흥-실험음악에서 가장 흔히 접할 수 있는 연주 방법은 악기와 일상의 사물, 혹은 전자 장치가 본래 기능으로부터 탈피한 방식일 것이다. 해외에서는 실험음악가들이 악기와 일상 사물에 잠재된 독특한 음향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그것을 음악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이론화하여 ‘크랙(Crack/Cracked Everyday Electronics)’이라 부르기도 한다. 갈라지고 부수는 의미의 ‘크랙’은 실험음악 범주의 여러 작업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미적 태도이자 연주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번 닻올림픽에 참가한 연주자들도 이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닻올림픽 2017> 조인철 CHO Ihchul + 최세희 CHOI Sehee
사진 : 박정근(조광사진관)

드럼 연주자 조인철은 심벌이 갖는 소리의 최대치를 탐색하는 한 방식으로 심벌을 두드릴 때 발생하는 진동음에 마이크를 대고 그 증폭된 노이즈 사운드가 스피커를 통해 발산되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은 스틱으로 쳤을 때 소리가 바로 발산되는 타악기의 전형적인 특징에서 벗어나고자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바이올린 연주자 최세희는 줄을 조절하여 인위적으로 음정을 조정하고 줄 사이의 마찰로 바이올린이 낼 수 있는 날 소리들을 끌어냈다. ‘12 dog cycle’의 나이젤 브라운은 아코디언을 해체하고 재구조화하여 내부 공기를 통해 움직이는 금속판에서 연속적인 드론(drone)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일상의 사물을 활용한 사례도 다양했다. 로 위에(lo wie)는 두 대의 타자기를 나란히 놓고 한쪽 타자기에 기다란 흰색 종이를 끼운 다음, 침묵 속에서 준비해온 텍스트를 보며 간간이 타이핑을 하거나 레버를 돌려 한쪽 타자기에서 빠져나온 종이가 다시 다른 쪽 타자기에서도 모두 빠져나올 때까지 긴 시간 동안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이렇게 침묵이 강화된 퍼포먼스는 의도적으로 청취자의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연주 바깥에서 나는 다른 소리들의 침투에도 귀 기울여 볼 것을 제안한다. 가와구치 타카히로는 장난감 나팔과 전구, 전자 장치를 재조합하여 몇 가지 버튼만 누르면 나팔 소리와 전구의 불빛이 작동하는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다. 타쿠 우나미(Taku Unami)는 고무호스와 연결된 장치가 켜지면 커다란 봉투에 공기가 풍성하게 주입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오스트리아의 노이드(Noid)는 조 포스터(Joe Foster), 코스티스 킬리미스(Kostis Kilymis)와의 협연에서 여러 색깔의 비닐봉지를 손으로 접었다 펴고 부스럭거리는 연주를 보여주었다. 가와구치 타카히로ㆍ홍철기ㆍ최준용은 만국기ㆍ소방용 방호 담요ㆍ바람ㆍ턴테이블ㆍ빛ㆍ탁구공 등을 활용해 1층 전시공간을 유유히 돌아다니며 사물이 스스로 소리를 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고 소음과 빛이 공간을 점차 풍성하게 채우도록 했다. 리에 나카지마(Rie Nakajima)는 유리컵ㆍ구슬ㆍ사기그릇ㆍ깡통ㆍ공기가 주입되는 비닐봉지와 모터로 돌아가는 작은 장치들을 1층 전시공간에 물고기를 방사하듯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이렇게 연주자의 역할이 최소화된 상황에서 사물 자체가 소리를 만드는 사례에서 엿볼 수 있듯이, 오늘날 실험음악에서는 과연 연주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닻올림픽 2017> 가와구치 타카히로 Takahiro KAWAGUCHI + 최준용 + 홍철기 
사진 : 박정근(조광사진관)

<닻올림픽 2017> 리에 나카지마 Rie NAKAJIMA
사진 : 박정근(조광사진관)

Crack 2: 노이즈 사운드, 실험음악의 유사성

이번 닻올림픽에 참가한 대다수 음악가들은 복잡한 케이블이 연결된 전자 장비나 랩탑을 사용했지만, 그들이 만드는 노이즈 사운드는 음악가마다 독특한 자신만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인도네시아의 실험음악가이자 노이즈 다큐멘터리 〈비싱(Bising)〉의 공동프로듀서인 리아 리잘디(Riar Rizaldi)는 조명이 꺼진 캄캄한 무대에 서서 랩탑을 수직으로 세우고 조작하여 부스러지는 질감의 노이즈와 필드 리코딩을 몰입도 있게 들려주었다. 홍콩의 데니스 웡(Dennis Wong)은 묵직한 압력이 느껴지는 노이즈와 함께 하드웨어 기기에 연결되어 있는 선들을 하나씩 빼 바닥에 던지는 인상 깊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국내 실험음악 쇼케이스 ‘레귤레이션스(REGULATIONS)’의 공동기획자 조정연과 김형중 역시 랩탑과 하드웨어 장비를 이용해 케이블 선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건조한 질감의 노이즈를 만들었다. 그리고 강력하고 거친 노이즈들과는 달리 마틴 케이처럼 시원한 폭포수 같은 노이즈로 귀를 환기해주는 퍼포먼스도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언급한 악기ㆍ사물ㆍ하드웨어 장비ㆍ랩탑ㆍ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이용한 연주방식은 실험음악 퍼포먼스에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노이드가 비닐봉지로 소리를 낸 것과 닻올림 연주회(98회)에서 김윤기가 비닐봉지로 소리를 낸 것, 타쿠 우나미와 리에 나카지마가 봉지에 바람이 들어가도록 한 작업과 닻올림 연주회(74회)에서 류한길이 봉지에 바람을 넣은 사례, 또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를 조작하여 강력한 노이즈 사운드를 만드는 사례들은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매체를 활용한 유사한 연주방식들로 군집화할 수 있다.

<닻올림픽 2017> 데니스 웡 Dennis WONG
사진 : 박정근(조광사진관)

2000년대 이후로 전지구적인 테크놀로지 환경의 변화는 음악가들에게 어느 정도 보편적인 음악 제작 환경을 제공했고 이는 실험음악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게 보면 실험음악 가운데 매체가 같고 소리가 유사한 사례가 종종 발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각의 소리가 구동되는 물리적 과정과 소리가 발생한 환경은 전혀 다른 맥락일 수 있으며 연주자의 특징이 발현되는 문화적 배경도 무시하기 어렵다. 게다가 대다수의 실험음악이 ‘즉흥’으로 연주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과물로서의 소리보다는 현장에서 소리를 듣는 ‘과정’ 자체가 이 음악에서는 더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실험음악에서 가시적인 매체와 연주방식의 유사성만으로 ‘이미 누군가 했던 방식’이라는 비판을 섣불리 하는 것은 과정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공평하지 못한 처사가 될 수 있다.

변화하는 청취 경험과 공동체의 장

이번 닻올림픽의 첫 번째 전야제는 도시의 소리가 침투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허락했다. 반면에 본 공연은 외부의 소리를 최소화하여 연주자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그런데도 외부 소리가 철저히 차단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데 연주장 입구에서 사람이 드나들 때마다 나는 소리와 불빛으로 시선을 빼앗기기도 했고 반대편에서는 멀리 영등포역의 기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도 했다. 필자의 경우 기차 소리는 그다지 소음으로 인식되지 않았고 입구 주변과 객석에서 사람들이 발생시키는 소리는 감상에 방해되는 소음으로 여겨졌다. 즉 ‘도시의 소음’과 ‘객석의 소음’을 분리하여 인식한 것인데 이는 모든 소리를 수용했던 전야제에서의 감상 태도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닻올림픽은 소리의 세계를 청취자 스스로 어떻게 구획하고 수용할 것인가와 관련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것을 온쿄와 같은 문화적 차원의 운동으로 보기에는 미약한 부분이 있지만, 비교적 근래에 젊은 기획자와 연주자가 신에 서서히 유입되고 청취문화에서도 신 특유의 정서가 어떤 청각적 참여를 유도하기도 한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즉흥-실험음악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기란 쉽지 않았다. 이제는 그것이 가능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마련되었다고 본다. 다만 그 정서가 사회적 자본이라 할 수 있는 구성원 개개인 간의 연대감을 넘어 ‘청각적 지형’에서 형성될 수 있는 청취 공동체로서 발전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기고] 즉흥음악을 지속적으로 듣는다는 것 : 즉흥/실험음악 공간 ‘닻올림’에 대한 생각

** 본 글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9』 (지은이 : 모임 ‘오작’, 2016년 8월 발행, 발행 :도서출판 예솔) 에 실린 글로, 닻올림 웹사이트에 한해 게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즉흥음악을 지속적으로 듣는다는 것:

즉흥/실험음악 공간 ‘닻올림’에 대한 생각

다양한 음악관과 기보체계가 공존하는 현대음악에서 즉흥성은 여러 양상으로 나타난다. 한 음악작품의 일부를 즉흥적으로 연주하거나, 제시되어 있는 음형들을 원하는 순서로 연주한다거나, 그래픽으로 기보된 악보들을 연주하는 과정에서 소리를 내는 방법, 또는 소리의 성질이나 음악적 분위기 등을 행위자의 주관적 해석을 통해 구현하는 경우들이 그것이다. 물론 현대 이전의 음악, 또는 그 바깥의 장르들에서도 즉흥적 요소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바로크 시대에는 즉흥연주가 관습적으로 이루어졌고, 재즈에서는 즉흥성이 장르의 중요한 특징으로 지목된다.

그러나 작품이라는 개념으로 묶이지 않는 무명의 즉흥음악은 기존의 사례들과 조금 다르다. ‘연주자 A가 0월 0일 0시에 이 자리에서 즉흥 연주를 할 것이다’라고 소개된 뒤 만들어지는 음악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사건에 가깝다. 이를테면 불을 다 끈 공연장에서 손전등 불빛만 켜놓고 라디오를 든 채 주파수를 잘못 맞췄을 때 나는 노이즈를 들려준다던가, 컴퓨터상의 프로그램을 사용해 어떤 소리를 생성해낸다거나, 때로는 트럼펫, 바이올린 등 악기를 비관습적인 방식으로 연주하거나, 타자기 치는 소리, 턴테이블 바늘로 LP가 아닌 다른 물체를 긁는 소리를 내는 등 사물을 본래 쓰임새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 소리를 내는 식이다. 즉흥이기 때문에 어떤 음악이 펼쳐질지 모른다. 따라서 미리 명명할 수 없다. 예상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다. 그 음악이 연주되기 이전에 연주자가 누구인지, 이 연주자가 어떤 사물 혹은 악기를 사용해 연주할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결국 어떤 음악이 될지는 끝까지 다 들어보기 전에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감상자는 다른 음악을 들을 때와는 다른 나름의 태도로 예민하게 들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 예측불가능함과 불확정성이 즉흥음악의 난점이자 매력이다.

기본적으로 즉흥음악은 행위에 집중한다. 그 말 자체가 음악의 결과적 음향보다도 창작자 혹은 연주자가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즉 행위의 방식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즉흥음악에는 본래 행위자가 가지고 있었던 행동습관, 선호하는 음악적 요소, 또는 연주 당시의 분위기 등 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중 현장에서 즉흥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연주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진 이들이지만, 본질적으로 즉흥음악의 핵심적인 음악적 특성을 따지는 데 가장 중요한 고려대상은 아니다. (물론 즉흥음악은 행위자의 ‘듣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겠지만, 연주현장에서 관객의 ‘듣기’는 또 다른 영역이다.) 즉흥음악이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이 공연을 계속 찾아가는 청중이 있다면, 듣는 것 자체를 넘어 ‘지속적으로 듣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공간 ‘닻올림’

P1100622닻올림의 경우를 보자. ‘즉흥/실험음악 기반의 작은 공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있는 공간 닻올림은 2008년에 만들어져 실제로 작은 공간에서 꾸준히 즉흥음악을 연주해오고 있다. 초반에는 닻올림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릴레이’(Relay) 공연 시리즈, 노이즈 듀오 아스트로노이즈(Astronoise), 그리고 노이즈/실험/즉흥음악을 발매하는 레이블 ‘벌룬앤니들’(Ballon&Needle) 등을 통해 즉흥음악을 해오던 류한길, 홍철기, 최준용, 진상태 등의 즉흥음악가들이 주로 연주에 참여했다. 하지만 공연이 거듭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닻올림에 모였다. 기타리스트, 드러머, 첼리스트 등 악기 연주자들은 물론, 작곡가나 실험영화작가 등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이곳에서 연주했다. 최근 닻올림을 찾았던 국외의 아티스트로는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시리즈 ‘아르스 노바’의 객원지휘자였던 일란 볼코프(Ilan Volkov)와 『핸드메이드 일렉트로닉 뮤직』의 저자이자 현재 레오나르도 음악 저널(Leonardo Music Journal)의 편집장인 니콜라스 콜린스(Nicolas Collins)가 있다.

음악가들이 즉흥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제각각이다. 함께 밴드를 할 사람들을 모집했는데 어쩌다보니 노이즈를 하고 있었다거나, 악보의 제약을 벗어나 자유롭게 음악을 표현하고 싶었다거나 등, 그 이유는 다양하다. 다만 음악가들이 시작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기 이전에, 즉흥음악 그 자체가 어떻게 하나의 흐름으로 만들어져 계속되고 있는지 그 역사를 단번에 추적하기는 어렵다. 즉흥음악가인 홍철기에 의하면, 악음/소음, 음악/비음악, 음악가/비음악가의 경계를 허무는 것, 즉 지금의 즉흥음악이 바라는 것과 유사한 것을 지향해왔던 사례들로 제시되는 것들은 루이지 루솔로의 ‘소음 예술’ 선언과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영국 음악가 코넬리우스 카듀의 ‘스크래치 오케스트라’와 그를 주축으로 한 즉흥음악운동, 미국 시카고의 ‘AACM(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reative Musicians)’이나 프리재즈운동, 일본의 온쿄(音響)운동, 전자 즉흥음악 앙상블 ‘AMM’, 기타리스트 데렉 베일리(Derek Bailey)의 음악, 그리고 일본의 ‘재패노이즈’(Japanoise) 등이다[홍철기, “소음·침묵·즉흥의 소리 혹은 음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1, 2012.12.11. 웹사이트 참조]. 즉흥음악이 한국에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하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여러 움직임들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필자가 닻올림을 접하게 된 계기도 위의 예시 중 하나인 카듀의 작품 <논고(Treatise)>때문이었다. 2011년 5월 29일, 통의동 ‘이상의 집’에서는 “음악의 평등으로서의 음향의 탈조직화: 코넬리우스 카듀의 <논고>(1963~1967)”라는 이름의 공연이 열렸고, 류한길, 진상태, 최준용, 홍철기가 무대에 올랐다. 당시 필자는 그래픽 기보법에 관심이 많았고, 193페이지에 달하는 <논고>의 악보가 어떻게 소리가 될지 그 변환과정이 궁금했다. 공연장에 가보니 무대에는 일반적 의미의 악기가 아닌 여러 사물들이 있었다. 연주가 시작되자 사물들은 진동에 가까운 소리를 냈고, 때로는 연주자가 공간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진동하는 사물을 벽에 접촉시켜 소리를 내기도 했다. 악보의 음악화가 궁금해서 찾은 공연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듀의 <논고>가 본래 어떤 작품인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퍼포먼스가 흥미로웠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필자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닻올림의 공연장을 찾기 시작했다.

Cornelius Cardew’s Treatise played by Choi Joonyong, Hong Chulki, Jin Sangtae, Ryu Hankil from Balloon & Needle on Vimeo.

닻올림의 공연이 던져주었던 생각들

P1090527처음에 닻올림의 공연은 흥미로운 관찰 대상이었다. 소리를 만들기 위해 어떤 사물을 사용하는지, 어떤 순간에서 흐름을 바꾸거나 음악을 멈추는지, 모든 순간이 생경했다. 즉흥음악의 특성상 연주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음악이 펼쳐진다. 때문에 새로운 연주자를 만날 때마다 다른 사물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로 시간을 채우는 나름의 방식을 만날 수 있었다. 닻올림에서 공연되는 것을 ‘음악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하기를 주저하게 될 정도로 아주 다양한 소리들을 들어볼 수 있었다.

두세 번 정도 닻올림을 찾았을 때, 즉흥음악에 대한 낯섦과 생경함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두 번째 관심이 대상이 된 것은 소리였다. 악기가 아닌 사물들로부터 비롯되는 소리 혹은 소음은 내 귀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소리’라고 생각해왔던 영역을 빠르게 확장시켰다. 게다가 소리 혹은 소음을 ‘음악적인 소리’로, 혹은 ‘잘 조율되고 구축된 소리’로 변환시켜 듣기보다는 그저 물리적인 소리 그 자체로 듣게 되었는데, 그 소리의 감각 외에는 아무것도 호출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은 아주 편안한 경험이었다. 다음으로 주목하게 된 것은 한 연주가 시작되고 끝나기까지의 시간이었다. 소리들이 모여서 순간순간 음악이 ‘생성되고 있다’는 감각은 다른 음악들에서 일상적으로 느끼기 힘든 것이었다. 음악작품이라는 유령 같은 존재에 내재된 나름의 시간적 흐름이 아니라, 실제 시간을 기반으로 음악이 그때그때 만들어진다는 느낌은 정말 ‘지금 여기, 이 소리’를 주목하게 했고, 그다음 순간을 예민하게 기다리게 했다. 이 초반의 경험들은 즉흥음악의 조건과 재료에 대한 생각들을 던져주었다.

실험 혹은 음악

즉흥음악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 이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으로 감상하기 시작했을 때 연주자 및 공연에 따라 경험의 밀도와 힘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한 소리를 집요하게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아주 좋은 음악적 경험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연주자의 개인적 실험을 넘어서 관객과 공유할 수 있는 음악으로서 나름의 매력이 과연 있는지 의문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즉흥과 실험이라는 행위가 전면에 들어선 이상, 그 결과물로 나온 음악의 좋고 나쁨에 대해서 말하기란 쉽지 않다. 실험을 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어딘가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데서 일차적으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서다. 또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음악을 둘러싼 형식, 음악이 되지 못했던 것, 혹은 음악 이면에 숨겨져 있던 소리들을 겨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음악이 그들의 최종적인 결과물이 아니고, 그저 꾸준히 즉흥/실험음악을 해나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은 이 음악에 대한 판단을 우선 유보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닻올림을 계속해서 찾다 보니 나름의 판단기준이 생긴 것인지, 이 연주가 어땠고, 어떤 부분이 좋았고 어떤 부분이 아쉬웠는지를 점점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꽤 꾸준히 지켜보았던 닻올림의 공연들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다양한 연주자가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그만큼 나의 청취경험이 확실히 넓어진다는 것이다. 아쉬웠던 점은 두 가지다. 대체로 같은 공연장에서 비슷한 시간 안에서 각자 주력하는 사물로 음악을 만든다는 그 실험의 패턴이 유사하다는 것, 그리고 즉흥음악을 듣는 경험이 양적으로는 확실히 다양해졌지만, 과연 질적으로 나아졌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계속 새로운 연주자가 등장하고 낯선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음악을 듣지만, 청취경험의 기본적인 방식은 그대로다. 소리에 대한 실험을 지켜보는 ‘현장의 증인’으로서는 대체로 만족스럽다. 그러나 음악을 지속해서 듣는 관객으로서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우기가 어렵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닻올림이라는 공간이 지속되었고, 또 그 참여의 장이 확장되었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리고 쌓여가는 공연 횟수만큼 즉흥음악에 대한 감각이 더 정교해지고, 공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즉흥음악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닻올림의 공연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청취경험이 더욱 좋아졌다고 확신치 못하겠다는 점은 아무래도 아쉽다. 특히 최근의 공연들에서는 보통 3~4명(혹은 팀)이 모여서 한 연주회를 꾸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 사람의 음악을 조금 더 길게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리고 여러 명이 모이더라도 공연에 나름의 기획 혹은 일관성이 더욱 잘 드러난다면 좋지 않을까 싶다.

즉흥음악가이자 닻올림의 운영자인 진상태는 “(즉흥음악을) 계속 지켜보다 보면 나름대로 어떤 해석법을 찾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관점과 취향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주관이 생겨서 연주자에 대해 잘한다 못한다 하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진상태 인터뷰, 『인문예술잡지 F』 9호, 2013, 134]. 이 말처럼, 청취자는 물론이고 닻올림의 운영진 혹은 주축이 되는 구성원들도 나름의 관점을 분명히 갖게 되었겠지만 아직 공연장에서는 그 판단이 잘 보이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가능성을 계속 열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속성과 확장성을 얻기 위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지속적으로 밀도 높은 경험이 가능하도록 공연을 꾸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공간이 아니라 연주회가 지속되려면 청중이 필요하고, 계속 닻올림을 찾아오는 청중들 중 다양한 즉흥음악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더 집요하고 깊게 파고드는 즉흥음악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닻올림은 즉흥음악 신(scene)이 지속 가능하게 만들었고, 여러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판을 만들었다. 이제는 더 좋은 청취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어딘가에 힘을 싣는 작업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글 / 신예슬
원문 /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9』 p113~117

79_Martin Kay : Stadium – played back / diffused



나는 닻올림에서의 첫 번째 솔로 공연/퍼포먼스를 위해 실제 장소에서 전략적으로 설치한 다양한 스피커들과 전기 신호, 변환기들로 구성된 6 채널 사운드 시스템을 통해 녹음한 축구 경기 관람객들의 소리를 선곡, 이들을 제시하고 확산시켰다.

닻올림에서 들려준 녹음은 MCG 경기장 (멜버른 크리켓 그라운드)의 가장 중심부의 원형으로부터 스타디움 주변 교외의 가장 바깥쪽 원형까지 어떻게 각각의 물질과 공간적 위치가 관객들의 청각적 투영이란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공명을 재 구성하고 재 맥락화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 관찰하며, 동심원을 그리는 관객의 환호소리와 이들의 궤적을 기록하는 현재 진행중인 프로젝트이다.

그 당시의 퍼포먼스를 회상해보면 다양한 공진을 발생시키는 사물들 (드럼 키트/ 철문/ 플라스틱 지붕) 위에 변환기들을 설치했으나 이 장치들이 매우 강하지 않았으므로 녹음 당시에 약간은 혼란스러웠으나 문이 닫힌 화장실 안에 스피커를 설치함으로써 이 작업은 놀랍게도 확장되었다. – 녹음에서 또 다른 차원들을 부가시켰고 MCG 경기장의 서서히 멀어져 가는 상항을 퍼포먼스의 공간으로 치환시켰으므로.

마틴 케이

Stadium – played back / diffused at dotolim, Seoul, October, 31st, 2015

For my solo presentation/performance at dotolim, I presented and diffused a selection of football crowd recordings played through a 6 channel sound system, consisting of various speakers and transducers strategically placed throughout the venue.

The recordings I played were part of my ongoing project that charts the trajectory of a crowd’s cheering in concentric circles from the innermost ring of the MCG stadium, Melbourne to the outermost ring of its surrounding suburbs – observing how each material and spatial location re-frames and re-contextualises the emotional and psychological resonance of a crowd’s aural projections.

In looking back at the performance, I found that my placement of transducers on various resonant objects (drum kit | metal door | plaster roof) wasn’t so strong and slightly confused the recordings, but the placement of a speaker in the toilet with the door closed proved to be a fantastic extension of the work – it really seemed to add another dimension to the recording and brought the receding situation of the MCG into the performance space.

Martin Kay

번역 : Mr. To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