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후기] 눈을 감고 그리는 그림, 맘대로 맞추는 발 박자

공간 ‘닻올림’의 즉흥 음악 정기연주회 후기 // 이정빈

공간 ‘닻올림’은 2008년부터 오피스텔을 개조한 20석 규모의 소형 공연장 및 녹음 스튜디오로 즉흥-실험 음악을 중심으로 정기 연주회를 하는 공간이다. 6호선 상수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오피스텔 지상 7층에 있다.

#1
11월 1일 토요일 저녁 8시, 공간 ‘닻올림’에서 열리는 정기 연주회에 찾아갔다. 나는 공연 시작 시각보다 일찍 근처에 도착하게 되어 홍익대학교 부근에서 저녁을 먹었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길을 따라 공연장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상수역까지 이어지는 토요일 저녁의 와우산로 거리에는 분주한 활기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이 붐비는 밤거리 위에 많은 일이 뒤섞이고 있다. 그것은 고막을 자극하는 여러 결의 소리와 관련되어있다. 거리의 소리가 마구 겹쳐져 부풀어 오른다. 내가 아스팔트에 운동화를 부딪치며 내는 경쾌한 소리는 뾰족하거나 단단한 구두 굽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합쳐졌다. 수다를 떠들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순간 차도의 승용차가 내는 엔진 소리에 흩어지기도 한다. 노점에서 즉석에서 쇠를 갈아 귀걸이나 액세서리를 제조하는 남자를 얼마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전동 줄칼을 가지고 내는 요란한 소리가 과열된 오토바이 몇 대의 소리에 뒤덮여 사라져 버렸다. 장갑과 목도리를 파는 상인들의 너스레는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최신 힙합이나 케이팝 가요와 엉겨 붙기도 했다. 각자의 소리가 저마다 뽐내며 밤거리를 긁는 중이었고, 그러다 다른 더 큰 소리에 붙어버리거나, 뒤엉키거나, 마찰하면서 생소한 굉음을 만들어냈다. 정체가 궁금하지만, 정확히 잡아낼 수 없는 그런 소리들과의 술래잡기 한 판이었다.

오피스텔의 현관 유리문에 A4 치수의 공연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버튼을 누르고 잠깐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오피스텔 안에 자리한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친구의 방에 놀러 갈 때처럼 기대되는 과정이었다. 어느 짝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보였다. 둘은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의 파편들이 오고 갔다.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소리들이었다. 벨이 울렸고 7층에 내려 복도를 따라 걸었는데, 조용한 복도의 끝에서 어느 문에 붙은 포스터 하나가 여기가 공연장임을 작은 소리로 알리고 있었다. 암호를 해독해낸 기분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원룸을 무대와 객석으로 사용하는 공간 안에 무대와 객석이 아주 가깝게 맞붙어 있었다. 빼곡한 전선들, 장비들이 산만하게 널려 있었는데 그것들은 사실 정갈하게 정리된 묘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공연을 기다리며 앉아있는데 괜히 귀가 예민해져서 다른 관객들이 속삭이는 소리까지 모두 다 들어버리고 말았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2
턴테이블에서는 LP 레코드가 재생되지 않았고, 기타에서는 기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라디오나 스피커에서도 익숙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거기서는 전기들이 부딪히며 내는 마찰음, 사물 자체들이 서로 부딪힐 때의 마찰음, 쇠를 긁는 소리, 줄을 켜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시끄럽고 불편한 소리거나,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작은 소리였다. 연주자들은 사물이나 신체를 마치 악기처럼 어루만지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조율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지거나, 압도적으로 단단한 힘을 뿜어내기도 했다.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진 소리가 내 귀와 머리통을 갈기기도 했다. 그것들은 나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나를 넘어 공간을 가득 채웠고, 벽을 뚫고 밖으로 마구 뛰쳐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광폭한 그것들은 벽에 퉁겨져 다시 내 귀를 파고들어 왔다.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고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불편하고 이상한 소리와 계속해서 부딪히면서 귀는 더욱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소리가 잦아들자,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구체적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더니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고 몇 가지 장면들이 떠올랐다. 악 소리를 지르며 집 안을 뛰어다니고, 젓가락으로 프라이팬을 후벼파던, 한참 동안 라디오 스피커에 귀를 대고 있거나, 그것들을 모조리 분해해보았던 조각난 기억들을 맞추어보았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사물과 소리에 대해 몹시 궁금할 때, 두들겨보고 내리쳐 보며 그것들이 내는 소리를 즐기던 때에는 언제나 그만두라는 명령들이 함께 해왔다. 엄마는 시끄럽다며 귀를 틀어막았고, 선생님은 더 큰 소리를 내지르며 나를 제지했다. “계속 하면 손바닥을 맞는다.” 그러면 나는 그만두곤 했다. 실수나 호기에 의해 벌어진 날 것의 소리는 주변에 방해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들은 귀를 무디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 ‘내서는 안 되는 소리’, ‘들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만둬야 할 소리, 방해되는 소리, 괴롭히는 듯한 소리가 집요하게 귀를 자극한다. “이런 소리를 이토록 길게, 선명하게 들어본 때가 있었나?”, “내가 이렇게 소리에 집중했던 적이 있었나?” 이때 누군가 눈을 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또 누군가는 무언가 리듬을 찾아낸 건지 스스로 리듬이 되려는 건지 발 박자를 맞추기 시작한다.

65번째 정기 연주회가 열렸던 2014년 11월 9일을 끝으로, 기존의 공간 ‘닻올림’은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닻올림’은 2015년 1월 이후에 열릴 66회 공연부터 새로운 공간에서 정기 연주회를 이어나갈 예정이다.

글 // 이정빈

[제2회 닻올림 백일장] 차석 ‘즉흥음악에 대한 소고’

* 본 글은 2013년 ‘제2회 닻올림 백일장’에서 ‘차석’에 당선된 문광씨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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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음악에 대한 소고

즉흥 음악은 음악의 어떤 본질적인 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끊임없이 그 자체의 선율을, 그것을 만들어내는 몸짓과, 그 몸짓을 만들어내는 육체와 겹쳐 놓고자 한다. 이것은 약간 진부한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음악이 인간의 육체로부터, 몸짓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공간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할 때, 음악이 스스로를 일종의 순수한 시간의 현현으로서, 가장 비언어적이며 가장 비기호적인 추상으로서의 구조물로 간주할 때, 그 감탄할 만한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먼 과거나 미래의 것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즉흥 음악은 이와는 반대되는 것을 추구하며, 마치 창조에 있어 소멸을 정당한 절차로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육체에 밀착해 있다. 그것이 즉흥 음악의 매력이다. 여러 기록 매체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자의적인 죽음과 소멸은 여전히 즉흥 음악의 낭만인 것이다. 무에서부터 시작하여, 무로 끝나야 한다는 진부한 도식을 실현하는 동시에 그것을 개혁하려는 예술적 시도는 즉흥 음악 안에서 매우 강렬한, 형식에 대한 의지를 구성하고 있다. 형식이란 예술이 완수하고자 하는 과업이 가장 숙명적으로 반복해서 실행된 것의 결과물이다. 즉흥음악이라는 형식은 말하자면 형식에 대한 거부이며, 유일한 형식으로서 육체를 긍정하는 것이자, 현재에 대한 찬양이다. 즉흥음악이 육체와 선율의 일치를 꿈꿀 때, 선율의 기원에 대해 해명의 열쇠를 제공하는 요소가 전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추억의 순간적인 응집, 하나의 선율로 번역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선율이 됨으로써 미지의 실체가 형상을 갖게 되고, 모든 움직임이 거기서 유래하게 되는 듯한, 기억의 총체의 추상적인 응집이다. 그리고 선율의 기원에 대한 해명은 즉각적으로 육체의 기원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제는 일종의 형이상학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즉흥음악은, 형이상학이란 세계의 음악적 해명이다, 라는 명제 위에 스스로를 올려놓고 있으므로, 즉흥음악에 있어 형이상학의 필요성은 도취에의 필요성과 더불어 증가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즉흥음악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의혹을 갖게 될 것이다. 육체와 선율 간의 무한한 연결점들로 인해 즉흥음악은 설득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더 밀접하고, 더 내면적인 관계와 소통을 원한다. 기억보다 더 내밀한 것, 즉 망각을 공유한다는 낭만이 다시 한 번 연주자와 관객을 기이한 관계로 묶어 놓는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낭만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과 육체가 즉흥의 선율 안에서 합일점을 찾아내고, 그 지점이 망각 속으로 던져져야만 한다는 절박한 필요가 있다. 보다 덜 과거의 것이 될수록, 현재의 창조성의 밀도가 전 과거의 추억을 압도하여 그 감정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될수록 선율은 순결한 것이 된다. 순결이란 결코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것은 거의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우리를 엄습한다. 우리는 우리가 낡지 않았다는 것을, 과거의 인간들에 비해 조금도 왜소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영감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 그 형상은 항상 과거의 것이므로, 즉흥음악은 그 도취에 있어 영감을 능가하고 압도해야 한다. 즉흥음악은 육체를 항구적인 하나의 영감으로 만들기를 원할 수도 있다. 영감과 도취가 갖는 구분점이 무의미해지는 지점, 형상과 추상 사이에 놓인 선율을 통해, 육체와 넋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지점에 놓인 선율을 통해, 스스로를 망각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즉흥음악이 갖는 특이성이다. 그런 면에서 즉흥음악은 도취의 정형성을 실험하고 있다. 그 감정을, 그 영광의 순간을 다시 체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 과거를 다시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 사람들은 그 음악이 이미 잊혀져버렸다고, 그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없는 이상, 똑같은 곡을 그대로 연주한다고 해도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즉흥음악은 여전히 꿈꾸고 있다. – 그것은 무한히 돌아오는 위대한 순간이며, 죽음 너머로까지 이어지는, 현재를 능가하는 영원한 현재이다.

글 / 문광(門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