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닻올림 백일장] 차석 ‘즉흥음악에 대한 소고’

* 본 글은 2013년 ‘제2회 닻올림 백일장’에서 ‘차석’에 당선된 문광씨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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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음악에 대한 소고

즉흥 음악은 음악의 어떤 본질적인 원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끊임없이 그 자체의 선율을, 그것을 만들어내는 몸짓과, 그 몸짓을 만들어내는 육체와 겹쳐 놓고자 한다. 이것은 약간 진부한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음악이 인간의 육체로부터, 몸짓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 공간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할 때, 음악이 스스로를 일종의 순수한 시간의 현현으로서, 가장 비언어적이며 가장 비기호적인 추상으로서의 구조물로 간주할 때, 그 감탄할 만한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먼 과거나 미래의 것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즉흥 음악은 이와는 반대되는 것을 추구하며, 마치 창조에 있어 소멸을 정당한 절차로 받아들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육체에 밀착해 있다. 그것이 즉흥 음악의 매력이다. 여러 기록 매체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자의적인 죽음과 소멸은 여전히 즉흥 음악의 낭만인 것이다. 무에서부터 시작하여, 무로 끝나야 한다는 진부한 도식을 실현하는 동시에 그것을 개혁하려는 예술적 시도는 즉흥 음악 안에서 매우 강렬한, 형식에 대한 의지를 구성하고 있다. 형식이란 예술이 완수하고자 하는 과업이 가장 숙명적으로 반복해서 실행된 것의 결과물이다. 즉흥음악이라는 형식은 말하자면 형식에 대한 거부이며, 유일한 형식으로서 육체를 긍정하는 것이자, 현재에 대한 찬양이다. 즉흥음악이 육체와 선율의 일치를 꿈꿀 때, 선율의 기원에 대해 해명의 열쇠를 제공하는 요소가 전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추억의 순간적인 응집, 하나의 선율로 번역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선율이 됨으로써 미지의 실체가 형상을 갖게 되고, 모든 움직임이 거기서 유래하게 되는 듯한, 기억의 총체의 추상적인 응집이다. 그리고 선율의 기원에 대한 해명은 즉각적으로 육체의 기원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제는 일종의 형이상학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즉흥음악은, 형이상학이란 세계의 음악적 해명이다, 라는 명제 위에 스스로를 올려놓고 있으므로, 즉흥음악에 있어 형이상학의 필요성은 도취에의 필요성과 더불어 증가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즉흥음악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의혹을 갖게 될 것이다. 육체와 선율 간의 무한한 연결점들로 인해 즉흥음악은 설득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더 밀접하고, 더 내면적인 관계와 소통을 원한다. 기억보다 더 내밀한 것, 즉 망각을 공유한다는 낭만이 다시 한 번 연주자와 관객을 기이한 관계로 묶어 놓는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낭만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과 육체가 즉흥의 선율 안에서 합일점을 찾아내고, 그 지점이 망각 속으로 던져져야만 한다는 절박한 필요가 있다. 보다 덜 과거의 것이 될수록, 현재의 창조성의 밀도가 전 과거의 추억을 압도하여 그 감정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될수록 선율은 순결한 것이 된다. 순결이란 결코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것은 거의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느낌과 함께 우리를 엄습한다. 우리는 우리가 낡지 않았다는 것을, 과거의 인간들에 비해 조금도 왜소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

영감은 형상을 가지고 있다. – 그 형상은 항상 과거의 것이므로, 즉흥음악은 그 도취에 있어 영감을 능가하고 압도해야 한다. 즉흥음악은 육체를 항구적인 하나의 영감으로 만들기를 원할 수도 있다. 영감과 도취가 갖는 구분점이 무의미해지는 지점, 형상과 추상 사이에 놓인 선율을 통해, 육체와 넋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지점에 놓인 선율을 통해, 스스로를 망각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즉흥음악이 갖는 특이성이다. 그런 면에서 즉흥음악은 도취의 정형성을 실험하고 있다. 그 감정을, 그 영광의 순간을 다시 체험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 과거를 다시 느끼는 것이 가능할까? 사람들은 그 음악이 이미 잊혀져버렸다고, 그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없는 이상, 똑같은 곡을 그대로 연주한다고 해도 그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즉흥음악은 여전히 꿈꾸고 있다. – 그것은 무한히 돌아오는 위대한 순간이며, 죽음 너머로까지 이어지는, 현재를 능가하는 영원한 현재이다.

글 / 문광(門光)

[제2회 닻올림 백일장] 차석 ‘서울의 즉흥음악’

* 본 글은 2013년 ‘제2회 닻올림 백일장’에서 ‘차석’에 당선된 장지한씨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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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년간 서울에서 몇몇 인물들을 중심으로 소리라는 감각을 통해 지속적인 어떤 실천이 이루어 져왔다. 그들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소박하게, 더불어 규정하기 힘든 모호한 모습을 유지해왔지만 사람들에게 하나의 암묵적인 그룹으로 이해되어져왔다. 나는 그들의 어떤 공동체가 서울의 다른 문화적인 실천들과 구분되는 의미있는 풍경을 만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변화시키겠다는 적극적인 선언문도 없었으며 그들을 이끌어가는 중심인물도 없었다. 그저 ‘즉흥음악’ 이라는 표현만이 최대한의 공통분모가 될만큼의 느슨함과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을 찾아나가는 집단적인 실천으로서의 연주가 지속되었을뿐이다.

2012년 10월에 있었던 닻올림픽은 그동안 이들이 보여준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3일간의 즉흥음악 페스티벌로서, 공연을 추진했던 진상태는 ‘예술기관의 기금에 의존하지 않고 큰 행사를 치러 내는 의미있는 첫발을 디뎠다’ 라고 자평했다. 즉 그들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으로의 실천을 위해 기존의 제도와 거리를 둔 것이다. 이는 자본의 외부를 허락하지 않는 지금, 여기의 상황에서 즉흥음악이 라는 현재의 교환 바깥의 실천을 위해서 필연적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기존 예술계의 시스템과 거리를 유지해왔다. relay, dotolim과 같은 소규모의 정기적인 연주회는 음악가의 공연이 진행되는 기존의 공연장이 아니라 까페, 오피스텔과 같이 음악가와 관객의 전통적인 위계, 교환관계가 무시되는 일상의 공간들이었다. 더불어 연주의 기록들은 manual, Balloon&Needle 과 같은 그들 스스로가 자주적으로 설립한 레이블에서 제작되었다. ‘자신의 작업을 발표할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이 없다는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는 류한길의 말처럼 그들은 기존의 공간 안에서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독립적으로 움직였고 이를 통해서만이 그들만의 새로운 감각을 계속해서 실험할수있었다.

이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현재의 불편한 환경을 돌파하는 만큼이나 그들 내부적으로 공동체를 지속시키는데 있어서도 기존의 모습과 형태를 달리했다. 작업을 지속시키기 힘든 상황에서 등장한 많은 공동체들은 어떤 동인, 컬렉티브의 이름으로 명명하고 그들 공동체 명의의 작업을 가시적인 리스트로만들수있는반면,이들은 그런방식으로 정리해서 파악해내기 힘든 모호하고 중심이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연주회의 기획자와 레이블의 소유자가 그들 공동체의 내부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각각 상황에따라 다르다. 이는 모임의 리더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성원 각자의 개인작업과 공동체라는 형식이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작가 개개인의, 혹은 공동체라는 집단적인 이름으로 환원할 수 없는 중간지점에서 그들의 작업이 진행되어온 것이다. 이는 가능한 정도의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때로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외부와 관계맺으면서 하나의 집단적인 실천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지배적인 흐름과의 거리와 중심을 비워내는 공동체의 모습은 즉흥음악을 통한 새로운 감각을 위해 필연적인것이었을것이다.기존의 공간들은 적극적으로 판매할 수 없는 형식을 수용할 수 없었을 것이고 기업과 다를바 없는 형태로 지분을 나누는 모임의 상황이었다면 그들은 지속적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실천을 위하여 독립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요청되고 유효했다면, 나는 역으로 즉흥음악이라는 형식이 그들만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했다는 생각도 든다.

기존의 악기와 연주방식을 넘어 비음악적인 매체를 활용하는 그들의 연주는 노이즈, 자유즉흥과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되어져왔다. 이는 쉽게 지각적으로 그 구조를 예측하고 이해하는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감각들이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충돌하는 모습을 의미했고 보편적인 음악의 형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불편함과 당혹감을, 새로운 청각적 경험을 갈망했던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움으로 다가 왔다. 이러한 그들의 연주가 보여주는 감각의 복잡함은 우리가 얼마나 제한되고 통제된 감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지를 증명할뿐만 아니라 소리를 통한 즐거움이 과연 어떠한 형식이어야 되는지를 보여 준다. 즉흥음악의 결과는 무한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신선한 텍스트였고 관객들은 연주자가 제시하는 공기의 진동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연주는 다른 무엇도 아닌 순수한 사운드로, 파동으로 다가온다.

가사를 강요하고 멜로디를 강요하는 가요, 혹은 팝음악이 ‘음악보다는 메세지이며 프로파간다’ 로 느껴진다는 홍철기의 말은 그들의 연주가 기존의 관습적인 음악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음악’ 이라는 형식 아래 무한한 청각의 감각을 극도로 협소한 상품의 형태로, 언어로, 어떤 이미지로 소비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형식을 벗어나 진정으로 소리의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들을 청각에 집중시키는것이며 일상의 익숙한 감각을 벗어나는 것이다. 즉흥음악의 형식은 바로 이러한 감각의 해방을 가능하게 하는데, 수많은 감각들의 예측할 수 없는 충돌은 그 속에 어떠한 명령도, 욕망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연주는 그저 기존의 언어와 문화의 영향력을 파괴하는 지점으로 나아간다.

그들의 연주에서 각자가 소리를 발생시키는 방식과 감각의 지점이 다를지라도 함께 공유하는 방향은 있는것 같다. 류한길은 자신의 설치작업 [북소사이어티의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대담에서 ‘공기 중의 진동현상이라는 소리의 근본적인 문제‘ 를 고려한다고 말했고 오토모 요시히데는 이행준과 홍철기의 [확장된 셀룰로이드, 연장된 포노그래프]에 대해 ‘그들은 영상과 소리의 시작 지점에 존재하는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것이다‘ 라고 했다. 이처럼 매체가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물질성과 소리가 전달되는 공간의 문제에서 출발하는 그들의 작업은 기원이 부재한다. 더불어 류한길은 ‘언제나 망가질 수 있는 것들‘ 에 관심이 가며 그러한 시각성이 음향의 문제와 닮아있는것 같다 고 했다. 나는 그들이 연주하는 소리가 증폭되어 공간을 가득 채우는 순간에도 어딘가 약하며, 낯설다고 느껴왔다. 그것은 아마도 해석을 위한 참조대상이 없는채로 자본이 잠식하는 완전한 세상의 감 각을 언제나 역행하는 쪽으로 향하기 때문일것이다.

이렇게 연주의 결과물이 그 속에 어떠한 관습적인 코드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연주자 와 관객을 어떤 공동체, ‘우리’ 의 모습으로 묶어내는것 같다. 연주의 순간, 계급과 젠더를 넘어서는 청각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어떠한 물질도, 이미지도, 기호도 존재하지 않는 목적없는 소리의 교환 은 어떤식으로든 대가를 바라는 지금, 여기의 보편적인 풍경과는 대조적이다. 연주자는 그저 공간안 에 다층적인 파동을 던지는 사람일뿐 특별한 문화적인 기표를 지니지 않는다. 관객 역시 감상의 순간 에 스스로의 어떠한 욕망도, 환상도 투영시킬 수 없다. 즉흥음악이 충돌시키는 복잡하며 낯선 감각은 ‘우리’ 에게 그러한 간극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렇게 즉흥음악은 형식 내부에 독립적이며, 중심없는 공동체를 이미 스스로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권위를 허락하지 않는 작업이 그들만의 공동체를 필연적으로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저 공기의 진동을 나누었고 그 사운드는 고정된 의미를 지니지 않았다. 그들이 보여준 지난 몇년간의 실천에 홍철기가 말하는 ‘정치적‘ 인 예술이라는 수사는 의미심장하다. 그의 말대로 모든 음악적 규칙과 관습을 부정하며, ‘아무나’, ‘누구나’ 의 예술로서 평등을 향했다. 예술적인 행위가 자본의 내부를 향해, 누군가의 권력속으로 향하는 지금 끊임없이 바깥을, 다른 감각을 향하는 그들의 실천은 지난 몇년간 이곳에서 조용하지만 의미있는 풍경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들이 끊임없이 어딘가 잘못된 곳, 잘못된 장소로 향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그 순간의, 이상한 곳에서의 (불)가능한 해방의 공간을 이어나갈 ‘우리’의 역할만이 남았다.

글 / 장지한

[제2회 닻올림 백일장] 입선 ‘작곡가가 즉흥연주에 빠진 이유’

* 본 글은 2013년 ‘제2회 닻올림 백일장’에서 입선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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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가 즉흥연주에 빠진 이유

즉흥연주는 작곡과 연주가 동시에 이루어 진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오선지를 눈앞에 두고 천천히 해도 될 작곡이라는 절차를 순발력있게 악기 연주와 함께 밟아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단순한 작곡이나 악기연주보다 한 차원 높은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옛 서양음악은 본래 연주자와 작곡가의 분리가 없었으며, 모짜르트, 베토벤 등 후대에 길이 남는 작곡가들 모두 뛰어난 즉흥연주 실력을 발휘했을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럽의 유명한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들은 미사때 훌륭한 즉흥연주를 선보인다. 일례로, 20세기 최고의 프랑스 작곡가 메시앙 역시 수십년을 노트르담의 오르가니스트로 활약하였다. 뿐만 아니라, 악보를 기보하지 않는 수많은 대중음악가들과 재즈 뮤지션들 또한 연주를 통해 작곡을 하거나 아예 즉흥연주를 자유자재로 할 줄 안다.

현재 클래식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지나친 분업화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즉흥연주는 커녕 악기를 자유롭게 다룰줄 모르고 단지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는 것만 잘 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소리를 머릿속에서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감각과 능력이 있다면 물론 이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단지, 1950년대의 일부 음악과 같은 지나치게 수학적이거나 계산적인, 결과적으로 음악적이지 않은 음악이 나올 위험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평소에 악기를 다루지 않는 작곡가는 무대에서의 현실을 잊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곡을 전공한 필자는 즉흥연주를 통해 오선지에 작곡을 하던 평소의 습관에서 비롯된 생각의 틀에서 모처럼 벗어나고자 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처음 시작한 즉흥연주의 목적은 청중에게 무엇인가를 들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012년 4월에 뜻이 맞는 작곡가와 연주자들을 모아 즉흥음악 모임 “이십구”를 만들었을때에도 비슷한 이유로 모임장소를 연습실로 정하고 모임의 성격 또한 비공개 비밀 모임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자 하는 바램이 있었고 모두에게 편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하여 비공개로 모임을 가진 것이다. 이때 모임에 가담한 클래식 연주자 또한 즉흥연주를 통해 그동안 악보를 보고 연주하던 제약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뮤즈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고 즉흥연주를 통해서 어느 정도 해소가 될 수 있었다.

“문래레조넌스 2” 사운드아트 창작 워크샵에 참가하기 이전의 이런 즉흥연주의 경험을 가진 이후,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린 워크샵과 “닻올림픽” 즉흥음악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무대에서 즉흥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이는 연습실이나 워크샵에서 하는 즉흥연주와는 소리 자체는 같을 수 있었으나 몇가지 본질적인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4명이상 되는 대형그룹 내에서의 즉흥연주는 워크샵이나 연습단계에서는 서로의 소리를 듣기는 하되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가 더 강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전체적으로 시끄럽거나 쉼이 없는 바쁜 소리들의 향연이 이어졌다. 그러나 연주 상황에서는 이 모든 사소한 소리들이 청중이 있음으로 해서 더 비중있는 제스쳐들로 다가오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 어느 동작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게감이 강하게 느껴져서 굉장히 조심스럽게 소리를 만들어내고, 결과적으로 전체적으로 작은 소리가 더 많아지는 연주가 되었다.

같은 행위를 하였을 때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과 청중이 있는 상황 사이에 그 행위의 의미가 차이가 있을 까? 그 일이 그 순간 그곳에서 일어난다는 것 자체는 같을 수 있으나, 청중들이 그것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실도 즉흥연주와 행위예술에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흥미로운 것은 즉흥연주는 예측이 불가능한, 짜여진 각본이 어느정도는 있을 수 있으나 악보만큼 구체적으로는 없는, 완전한 라이브 음악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감이 매우 중요하고, 청중으로서 그 현장에 있다는 것이 굉장히 설레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현대음악이나 행위예술, 즉흥음악 모두가 성공률(?)이 상당히 낮은 편인, 검증되지 않은 현재진행형 예술이라서 감상자에게 질 낮은 공연이 선사될 수도 있는 리스크가 있는 공연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자나 관객 모두가 흥미를 잃지 않고 자꾸만 해보려고 하고 계속 들어보려고 하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 군계일학처럼 훌륭하게 반짝거리는 예술적 우연이 나타날지 알 수 없다는 점 바로 그것 때문이 아닐까?

글 / 신지수